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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시론]부처님 오신 날

 

그 자체로 행복한 것,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것을 하느님이라 부르던, 부처님이라 부르던, 아니면 ‘참나’라 부르던 바로 순일한 그 무엇을 느끼는 일, 절대순수를 만나 순수해지는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을 믿는 것이고, 불자는 가장 순순한 마음을 담아 등을 켜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에 사는 우리는 언제나 순수할 수가 없다. 순수해지기 위해 도시를 떠날 수도 없고 속세를 버릴 수도 없다. 산으로 들어가 산이 되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저 우왕좌왕, 좌충우돌, 동분서주하게 만드는 이 산만한 도시에 살면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괴로워한다. 그 진흙탕이 내 속에 참사람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다.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했다는 그 분! 그 말이 어찌 과대망상증 환자의 변이겠는가.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보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고 으뜸의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자기를 바로 보는 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얀마에서 존경받는 비구 우 조티카의 책 <여름에 내린 눈>을 읽다가 그의 조언에 밑줄을 쳤다. 그가 말한다. 멋있는 사람이나 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말라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가치 있다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자기 삶을 장식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타인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터를 잡고 살림을 하고 있는 생각과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삶을 물들이고 있는 생각과 정서들이 있다. 사랑과 기쁨과 낙천성 같은 긍정적인 정서나 성향들이 있지만, 그런 정서들은 이미 긍정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억압이 없어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억압하거나 외면하고 있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부정적인 성향이나 상태 혹은 정서들이다. 질병과 고독, 슬픔과 불안, 질투와 분노 같은 것들! 예를 들어 오셀로는 자신의 질투와 분노를 살피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데스데모나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데스데모나를 사랑하는 오셀로는 이아고가, 사랑할 때 조심해야 할 무서운 것, 질투를 조심하라고 빈정댈 때에도, 난 질투 같은 거 안 한다며 자신 있어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 데스데모나는 아무 일도 저지른 것 없는데 그녀의 손수건을 다른 이가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 때문에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아름다운 악마라 부르며,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고 목을 졸랐다. 질투에 사로잡힌 것이다.

일단 질투에 사로잡히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상대의 말은 모두 변명이 되고, 상대의 행동은 침묵까지도 모두 의심스런 알리바이가 된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나다. 그러니 나 자신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만약 오셀로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찬찬히 살피고 그것이 질투임을 알아차렸다면 적어도 데스데모나에게 투사하여 그녀를 죽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디 질투뿐일까.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의 횡포도 결국 마찬가지의 논리라 생각된다. 갑의 횡포는 나오는 곳은 생존밖에 모르는 사람의 욕심이 아닐까. 일단 생존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횡포를 부리면서도 횡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상대를 함부로 착취하게 된다.

재밌는 것은 세상은 연결되어 있어 영원한 갑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은 인허가를 받으려는 자들에게는 갑이지만, 의원들에게는 을이다. 을의 입장에서 의원들을 욕하는 공무원이 갑의 입장이 되어 시민들 위에 군림할 때 무슨 생각이 들까. 내가 갑일 때 을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갑에게 내가 받아도 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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