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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살바도르 달리의 ‘창가에 서 있는 소녀’

 

 

 

살바도르 달리의 ‘창가에 서 있는 소녀’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완성했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 이 작품은 한때 젊은 여성들이 애독하던 한 유명 심리학 서적의 표지에 실린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창밖을 바라보며 서있는 뒷모습의 소녀는 그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이다. 작품 전체에 감도는 차분한 색조와 단단한 느낌의 선들은 그녀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그녀가 팔을 기대고 있는 창턱은 드넓은 바다와 잇닿아 있고, 그녀가 입고 있는 굵은 하늘색 줄무늬 원피스는 그녀의 우아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동그랗게 말려 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뒷모습의 소녀가 바라보고 있다.

이즈음 살바도르는 아름다운 누이동생의 모습을 작품으로 몇 점 남겼다. 모두 서정적이면서도 단단한 형태를 지닌 그림이었고 주변으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마드리드의 왕립 미술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달리는 학교 수업으로부터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와 숙소를 열심히 오가며 그림 공부와 작업에 파묻혀 지냈다. 특히 파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같은 스페인 출신 화가 피카소에 심취했다.

1925년 작 ‘창가에 서 있는 소녀’에서 우리는 피카소의 영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입체주의 실험을 마치고 사실주의 기법으로 넘어간 이후였다. 이즈음 피카소의 작품과 달리의 작품은 매우 닮아있으며, 이는 그만큼 달리가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창가에 서 있는 소녀’를 보면 그가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말고도 한 가지 사실을 더 직시할 수 있는데, 그가 피카소의 화풍을 그저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 습득한 화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로 그는 피카소를 단순히 모방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입체파의 소묘와 채색을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통해 자기만의 감성을 표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창가에 서 있는 소녀’를 본 전문가들은 살바도르 달리가 장래가 매우 기대되는 화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학교 교수들도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달리의 작품 경향이 이후 그처럼 현격하게 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달리는 미치광이 변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를 진정 유명한 예술가로 알린 작품들은 ‘창가에 서 있는 소녀’와 같이 서정적이고 사실적인 작품이 아니었다. 짓이겨져 있거나 흘러내리는 신체, 인간의 오장 육부와 오물 등 충격적인 오브제들로 가득한 기이하고 흉측한 작품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꿈과 환상, 인간의 욕망을 다룬 작품들은 당시 대두하던 초현실주의 경향과 매우 잘 들어맞았고, 덕분에 그는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로 등극했다. 대중들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오브제로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매체들은 이러한 작품과 함께 화가의 기이한 행동과 옷차림을 집중해 다루었다.

밀레의 ‘만종’을 기괴한 작품으로 패러디하곤 했던 달리는 이십 대 때 완성한 ‘창가에 서 있는 소녀’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새롭게 그렸다. 소녀는 나체의 여인으로 등장하고 그의 주변에는 남근과 그 밖의 신체 부위들이 토막 난 채로 놓여있다. 본래의 작품이 완성되고 30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패러디된 작품 덕분에 그전에 완성된 ‘창가에 서 있는 소녀’ 역시 달리의 억제된 심리 상태가 반영된, 욕망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달리의 기이한 행동들, 편집증과 우울증,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살펴보다 보면 그가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자서전을 통해 유년시절부터 기이한 행동과 강박적 사고를 해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창가에 서 있는 소녀’의 주인공 안나 마리아는 또 다른 책을 통해 달리가 그처럼 이상행동을 한 소년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달리의 광기 어린 행동과 작품들은 그의 진짜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쇼맨십이었는지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갔고, 대중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게 됐다. ‘창가에 서 있는 소녀’를 그렸던 당시 화가가 미쳐있던 대상은 ‘여인’이나 ‘욕구’가 아닌 바로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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