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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향기]나라를 다스리는 기준 ‘經國大典’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법전이다. 국가보물 1521호로 지정된 을사대전(乙巳大典)은 1485년에 반포되어 시행한 것으로 6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앞서 조선건국 시에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있었고, 태조 6년에 제정하여 시행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여 국가 통치의 기본틀을 법률로서 할 것을 천명하고 최항 등으로 하여금 당시 현존하던 고유법과 관습법을 성문화 하도록 하였다. 1460년 세조 6년에 1차로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고 착오를 점검하기 위하여 시행이 미루어 졌다. 이어 예종 때까지 수정을 계속하고 시행을 신중히 하고자 미루다가 성종 때까지 와서 수정을 더 거쳐 1474년 경국대전 호전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처음으로 호전(戶典)이 시행되었고 연이어 형전(刑典)과 나머지 네 개 법전이 완성되어 시행해 오다가 1481년부터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다시 보완작업에 들어가 1485년 1월부터 시행하게 된 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을사대전(乙巳大典)이다. 조선건국과 함께 시작된 경국대전은 길게는 9대(代)의 왕을 거치는 동안 90여 년, 짧게는 세조의 본격적인 편찬 작업으로부터 3대에 걸친 30여 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중국의 법령에만 따르지 않고 우리 백성의 생활과 우리나라의 통치기준에 맞게 상세하게 규정하여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점검하였다는 점에서 위정(爲政)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조(吏曹)의 규정인 이전(吏典)에 보면 관리들의 근무 자세는 물론 출퇴근까지 엄격히 규정하고 있는데, 모든 관청의 관리들은 묘시(卯時)에 출근했다가 유시(酉時)에 퇴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묘시는 아침 5~7시이니 지금의 공무원 출근 시간보다 2~4시간 빠른 시간이고, 유시는 저녁 5~7시이니 요즘 공무원 퇴근 시간과 비슷하다. 예전(禮典)의 규정에 보면 과거시험으로 뽑는 관리를 지역별 인구비례에 의해서 뽑았는데, 인구가 많은 지역은 합격자를 많이 했고 인구가 적은 지역은 합격자를 적게 하여 뽑은 것이다. 형전(刑典)에 의하면 신분이 낮은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점에서 약자에 대한 사회복지제도가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신한 노비에게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 등 3개월여의 휴가와, 심지어 남편에게도 15일간의 휴가를 주어 출산한 아내를 보살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금의 건설교통부에 해당하는 공조(工曹)의 규정인 공전(工典)에 나룻배의 수명규정이 있어 흥미롭다. 당시로서는 중요한 교통수단의 하나였던 나룻배의 경우 5년이 되면 수리하고, 10년이 되면 배를 새로 만들도록 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썩기 쉬운 나무로 만들어진 수상 운송수단에 대한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경국대전 편찬을 마치고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최항(崔恒)은“성인(聖人)이 천하를 경륜하심에 반드시 오랫동안 덕을 쌓아 시기를 기다려야 하며, 임금이 시의(時宜)에 맞도록 빼고 더하는 것은 모든 규범을 만세에 남기시려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법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강제로 시행하는 사회규범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백성의 생사여탈에 관련된 것이므로 법의 제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오죽하면 법을 제정하고도 30여 년간 시행을 유보하며 점검했겠는가. 지금 국회에서는 패스트트랙이라는 국회법을 만들어 놓고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선거법’을 비롯하여 세계에 유례가 없다는‘공수처법’ 등을 조금의 숙려도 없이 반쪽의 진영논리로 통과시켰다. 오백여 년 전 왕정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비민주적 폭거로 이는 국민을 위한 위정(爲政)이 아니다. 오백여 년 전 경국대전을 제정하던 선조들의 애민정신과 국가관을 지금 우리의 위정자들에게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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