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 있어 ‘효제孝弟’란 생소하다 못해 서먹한 말이겠으나 뜻으로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인 즉, 곧 유학이 근본이던 조선조에 있어 안으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들과는 우애롭고,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할 것을 가르쳤던 인간의 도리에 관한 도덕률로써, 군자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仁’과 ‘예禮’의 시발이기도 한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있어 최소 단위 생활 질서인 ‘효제’와 그로 비롯된 ‘인’과 ‘예’의 갖춤이 있을 때 비로소 나라를 다스릴 군자라 일컬었으니(논어 학이편), 왕조가 무너지고 유학 사상이 무너졌어도 기초 단위 생활로서의 ‘효제’란 말은 오늘에도 긍정적이어서 생활에 필요한, 살아 숨쉬는 말일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섭생을 취해야 살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사람일진데 그저 그냥 먹기에만 급급하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도 가르침보다 굶주림부터 먼저 면하게 하셨고(5천명의 기적), 극도의 고통에 빠진 자를 불쌍히 보사 믿음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기적을 주고자 하셨듯, 인간답게 살자면 최
곡직은 대개 옳고 그름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자의적으로는 直은 많은 이들의(十) 눈으로 보아(目) 숨은 뜻 없이(隱>□) 곧음을 형상화, 곧다, 바르다, 펴다, 세로 등으로 쓰이고, 曲은 대살이나 싸리로 얽기 설기 엮은 모양을 형상화, 구불하다, 그릇되다, 자세히, 악곡 등으로 쓰인다. 불문곡직이란 4자 성어에서 보듯 고래로 윗사람의 비리나 잘못을 종종 아랫사람이 고발하다 보니 나라의 근간인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등, 그 해악에 옳고 그름으로 윗사람을 벌하기보다 오히려 아랫사람을 처벌하는 등 상전의 잘못은 묻지도 고발도 하지 못하게 한 사례들이 역사적으로 종종 있어왔다(주 효종 때 문공의 고사, 당 태종의 고사, 이조 세종 때 허목의 고사 등). 한편 오행으로 볼 때 直은 金이라 질서의 개념이 강하고 曲은 木이라 성장 혹은 생의 개념이 강한데, 直이라면 곧고 바르고 깨끗함을 뜻하지만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없듯 세속에 유리되다 보면 더불어 살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리고 세상을 올곧게 잡겠다고 칼을 휘두르면 쌍뚱 정리야 할 수 있겠지만 섬세하지 못한 칼 놀림에 주변을 상하게 하는 등 정도를 넘어 죽음으로도 몰수 있어 直을 조심해 다뤄야 할 것이다(死
우리는 생활 중에 예(禮)란 문제를 만나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부담을 느끼거나 어렵게 생각하거나 쉬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취업 면접에서든, 윗사람을 찾아뵙든, 사돈같이 어려운 분과 식사를 함께 하든, 예식이나 행사를 치르든, 특별한 자리나 만남에서 말이나 태도, 옷치레 등, 도대체 ‘禮’가 뭐길래 마음 씌게 하는지…. 공경의 표시 ‘禮’ ‘禮’는 서양(아브라함의 제사)이든 동양이든 하늘에 올리는 제사(禮=衣의관을 정제해+그릇에 재물을 담고+豆상을 차려+拜하늘에 절을 올리는)로 출발하여 군신관계 등으로 점차 확대되어 왔다. 동양에서의 ‘禮’는 주(BC1046~256)나라 당시 군자라면 누구나 교양으로 익혀야 할 6예(六藝~禮樂射御書數) 중 하나로 출발한 것을 공자(BC551~471)가 어린 날 학문에 뜻을 두고 주에 가서 배우고 왔다가 학문을 세우면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고전을 정리(시경 서경 예경 악경 역경 춘추 등)한 것이 역대 왕조들의 통치 이념과 맞물려 사회 각층의 질서 규범과 정신적 이념으로 승화되어 왔다. 공자가 정립한 사상의 요체는 ‘仁’과 ‘禮’로 치자와 피치자 간의 치도와 공경의 도를 행함에 필요한 덕목을 정립한 것이니, 곧 정치적 이념에 부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