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처럼 우리의 이름이 죽어서 후세에 전해진다면 가급적 좋은 이름으로 남기를 바랄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국왕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은 조선시대 27대 왕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는 곳, 종묘로 여행을 떠나보자. 종묘는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 27대 왕들을 우리는 태조, 태종, 세종, 고종 등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름들은 승하하시고 나서 종묘에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이 이름들을 왕의 이름, 즉 ‘묘호’라고 한다. 묘호는 끝에 ‘조’ 또는 ‘종’이 붙는다. 이러한 조종의 묘호는 당시에는 황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500년의 긴 역사동안 조종의 묘호를 계승해 왔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조종의 묘호에서 제외된 사람이 있다. 바로 조선의 2대왕 정종이다. 정종은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기까지 300년이라는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정종이 처음 종묘에 모셔질 때에는 ‘공정왕’이라는 이름으로 모셔졌다. 공정왕은 중국에서 내린 시호인데, 그 시호를 그대로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맞아 고향을 찾는 발길도 늘어난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전원풍경과 함께 낡았지만 정갈한 한옥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탓이리라. 오늘은 고향 집을 생각나게 하는 남산한옥마을로 여행을 떠나보자. 남산한옥마을은 서울의 사대부가의 집들을 모아 놓은 한옥전시관 같은 곳이다. 흩어져있던 집들을 한데 모아놓은 터라 고향마을 같은 느낌은 조금 덜하지만 그래도 남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자연을 벗 삼아 한옥을 여행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다. ‘한옥’이라는 말은 서양식 집이 많아지면서 우리 전통 집과 구분하기 위해 생긴 말이다. 서양식 집과 우리 한옥은 생김새로 확연하게 구분하지만, 사실은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누가 사는 집인가?’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이니 당연히 사람이 사는 것이겠지만 한옥은 사람만이 사는 공간이 아니다. 사람이외에 한옥에는 누가 함께 살고 있을까? 첫 번째는 ‘신’이다. 한옥에는 신이 함께 살고 있다. 한 명의 신도 아니고 여러 명의 신이 살고 있다. 그 중 대장 신은 성주신이다. 성주신은 집의 가장을 수호하는 신으로 대청에서 살고 있다. 한옥에서
한해를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비는 소원 중 하나가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이리라.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해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오늘은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가 마을로 손꼽히는 곳 여주로 발길을 옮겨보자. 강가마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주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여주의 아름다움 여덟 가지를 일컬어 여주팔경이라 하는데, 팔경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신륵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이다. 신륵사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는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후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원효대사에 의해 지어졌다 전해져 오는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절을 지으려고 했을 당시 이 곳은 연못이었다. 이 연못이 신성한 사찰이 들어설 곳이라고 원효대사의 꿈에 한 노인이 일러주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7일 동안 기도를 드렸고, 9마리의 용이 승천 한 후에야 비로소 신륵사를 지을 수 있었다. 9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은 구룡루라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다. 신륵사가 대규모 사찰이 된 것은 고려 말의
2015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올 한해 자신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해를 준비한다.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함에 있어 1월 1일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기도 한다. 오늘은 일출명소가 아닌 소원을 빌 수 있는 색다른 곳, 전등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전등사에는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이 윤장대는 소원을 써서 넣고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불교문화재이다. 윤장대는 손잡이를 잡고 연자방아를 돌리듯 360도 돌리는 것으로 석등처럼 생겼다. 윤장대 안에는 불경을 넣어두는데, 불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돌리면 불경을 읽는 효과를 얻는다. 전등사 윤장대는 예천 용문사에 있는 윤장대(보물 684호)를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전등사의 윤장대는 현대화 기법으로 재현되어 있어 용문사의 윤장대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 윤장대에 경전 대신 소원을 써서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어 전등사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쯤은 윤장대를 돌리고 싶어 한다. 윤장대 옆으로는 전등사 전설 중 하나인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이다. 전등사에는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2그루가
꿈을 이루기 불과 4년여를 앞두고 승하하신 정조는 지금 어디에 잠들어 계실까?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 이어 오늘은 정조가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계신 융건릉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소나무가 시원하게 뻗어있는 숲길에서 오른쪽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이, 왼쪽에는 정조의 능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던 사도세자의 무덤이 ‘릉’인 것은 고종(광무3년)시기에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즉위를 하자마자 아버지께 존호를 올리고 ‘묘’를 ‘영우원’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정조13년에 지금의 위치로 능을 이전,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현륭원, 즉 융릉의 자리는 윤선도가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했던 천년의 명당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할 당시 그 곳에는 백성들이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살고 있던 백성들을 수원화성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한 정조는 다음날 이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한다. 집주인의 이름과 집 크기, 논 밭 보상 면적 등 보상에 필요한 직접적인 조사였다. 사흘 뒤에는 내탕금을 내려보내 보상금 지급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주가 결정된 날로부터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은 하나처럼 느껴진다. 정조의 이야기가 짙게 깔린 탓이리라. 지난번 다녀왔던 수원화성에 이어 오늘은 화성행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 있듯이, 1804년은 정조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해였다.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해로, 정조는 1804년을 선택했다. 왜 1804년이었을까? 1804년은 정조의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는 해로 스스로 국가운영을 해 나갈 수 있는 나이였다. 따라서 정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고자 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에서 노년을 살았다면 어디에서 살았을까. 바로 화성행궁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이다. ‘신풍루’라는 이름은 정조가 직접 지은 것으로 보통 ‘풍(豊)’은 풍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황제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풍’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부터는 ‘황제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즉, 수원화성은 정조의 새로운 고향임을 화성행궁 정문에 표시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새로운 고향을 자주 방문
2016년은 수원화성 축성 22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하여 수원시에서는 2016 수원방문의 해를 지정,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2012 한국관광의 별’이기도 하며,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50곳’에 선정되기도 해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오늘은 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을 여행해보자. 수원화성은 팔달문 구간을 제외하면 수원화성 전 구간을 성곽길을 따라 걸어서 여행할 수 있다. 수원화성의 구간 중 화성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곳은 장안문과 화홍문, 방화수류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수원화성의 정문은 장안문이다. 보통 남문이 정문인데 반해, 수원화성은 북쪽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서울한양에서 정조임금이 오실 때 입성하시게 되는 문이 장안문이다. 장안문을 비롯해 수원화성의 4개의 문은 모두 옹성을 갖추고 있다. 이 곳 장안문의 옹성이 조금 특이하다. 보통의 옹성의 문은 한쪽 모퉁이에 두게 되는데 장안문의 옹성은 가운데 나 있다. 이렇게 중앙에 문을 낸 것은 사방이 열리고 팔방으로 통하는, 즉 사통팔달하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평상시 사람과 물자의 원활한 유통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못내 아쉬워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서양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찰은 불국사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찰은 부석사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부석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부석사의 시작을 알리는 일주문까지 은행나무 가로수 길이 펼쳐져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은행나무 길이지만 부석사의 시작을 매력적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부석사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부석사가 위치해 있는 산은 태백산이 아니라 봉황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백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봉황산과 더불어 태백산의 기운을 함께 연결하고 싶었으리라. 부석사는 오르막길에 너른 축대를 쌓아 필요한 건물들을 앉혔다. 그래서 부석사는 천왕문에서부터 아홉 단의 석축을 올라야 무량수전에 이른다. 무량수전에 이른다는 것은 곧 극락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극락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듯, 무량수전에 이르는 안양문은 좁고 가파르다. 가파른 계단과 문을 통과한 뒤, 숨을 고르며 마주한 무량수전은 빛바랜 편액이 먼저 반긴다. 무량수전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극락에 왔으니 부처님을 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량수전에
이맘때쯤이면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단풍소식이다. 10월이면 단풍에 온 맘을 뺏기기도 하지만 넘쳐나는 인파와 도로 정체 때문에 정작 단풍놀이를 떠나는 것에 대해 망설이곤 한다. 이럴 땐 북적이는 단풍여행지를 피해 가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남해의 대표적인 여행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경남 통영의 한산도와 전남 여수 사이의 바다와 섬을 일컫는다. 오늘은 단풍과 바다, 문화유산이 공존하고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점인 한산도로 여행을 떠나보자. 한산도에 가기 위해서는 통영에서 먼저 배를 타야 한다. 배를 타고 30여분 정도만 가면 한산대첩 역사의 현장,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혼이 살아 있는 유서 깊은 섬 한산도에 도착하게 된다. 선착장에 내려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가는 곳은 제승당유적지이다. 제승당유적지는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를 집필하고, 작전회의를 하며,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다. 또한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승당과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 제승당 유적지이다. 충무공의 친필로 쓴 한산문을 지나 연인들이 걷기에 좋은 하트 길을 따라 경내 입구인 충무문으로 들어서면 정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가 화제가 되고 있다. 9월16일에 개봉한 영화 ‘사도’는 개봉 첫 주 만에 180만 관객을 돌파할 정도로, 소위 ‘대박영화’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세상을 달리하는데, 영화 속에서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도세자와 영조를 중심으로 한 사건들과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펼쳐진다. 오늘은 영화 ‘사도’ 속 이야기가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보자. 영화 ‘사도’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참으로 잔인한 출발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는 궁궐 법전 앞마당인 조정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곳은 창경궁 문정전 앞마당이다.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으로 왕의 집무실이다. 편전은 왕이 신하들과 일상적인 정치현안을 처리하는 곳으로 어전회의가 주로 열리는 공간이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당시 문정전은 ‘휘령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휘령전은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으로, 왕비가 승하하신 후 국상을 치른 뒤에 종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