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스님이 기억하는 고(故)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장)의 첫 모습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고 문익환, 고 계훈제 선생과 함께 선 장면이다. 이들은 당시 어디서든 늘 맨 앞줄에 섰고, 따르는 이들에겐 동기와 귀감 그 자체였다. 명진스님은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정한 길을 걸어가는 백기완 선생님을 항상 존경했고, 선생님도 나를 좋아해 주셨다. 일평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라고 백 선생을 회상했다. 명진스님은 MB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청와대가 개입한 불법 사찰을 당한 바 있다. 2010년 부인과 아이 둘이 있고 고가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나돌고, 따르던 신도들이 돌아서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때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백기완 선생이었다. 명진스님은 “2017년 50년을 몸 담았던 조계종에서 승적을 박탈당하자 백 선생님이 50분이 넘는 사회 원로들을 설득해 ‘명진스님 제적 철회를 위한 원로모임’을 만들고 좌장까지 맡아주셨다”라고 고마운 인연을 떠올렸다. 이어 “나뿐 아니라 많은 후배들의 어려움에 눈 감지 않고 선봉에 나서 도와주셨다. 현재 많은 국회의원, 장관들과의 인연이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정작 문제가 생기면 백기완
‘백기완 묻엄’. 고(故) 백기완(1933∼2021) 선생(통일문제연구소장)의 새긴돌(묘비)에는 약력이 빼곡하게 적힌 여느 것들과 달리, 정확히 다섯 글자뿐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가슴 가득히 글로 담을 수 없는 ‘백기완 정신’이 새겨졌다. ‘질라라비 훨훨’.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날갯짓을 하며 훨훨 날아오른다는 의미다. ‘재야의 큰 어른’ 민중운동 버팀목이던 백기완 선생을 잃은 지 49일 만인 6일,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 새긴돌 세우는 날’에 함께 한 이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다만 생전 민주주의와 분단 극복, 평화 통일을 이해, 특히 소외된 이들의 저항과 평등, 해방을 위해 걷고 또 걸었으며, 결국 훨훨 날아오른 백기완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서로를 위로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가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고 백 선생의 부인 김정숙 여사, 딸 백원담, 백미담, 백현담, 아들 백일 씨 등 유족들과 그를 따르는 제자, 노동권 인사 및 각지 시민들 수백여 명이 몰렸다. 이들은 백기완 선생의 무덤에 각자의 일터에서 따온 꽃잎을 뿌리고 꽃다발을 얹어 ‘꽃무덤’을 만들었다. 또 가수 정태춘의 클라리넷 연주로 ‘봄날은 간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생전 고인의 세월호 진상 규명에 대한 유지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백 소장의 장녀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는 17일 오후 CBS 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에 출연해 고인의 빈소를 찾은 문 대통령과 나눈 이러한 대화 내용을 전했다. 백 교수는 '문 대통령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는 진행자의 물음에 "(아버님께서) 마지막까지 세월호는 국민적 참살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민 참살이기 때문에 이건 어떻게든지 진상이 규명 돼야 하는데 진상 규명은 커녕 이번에 책임 소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을 했다"라면서 "(문 대통령께) 그 부분을 좀 더 최대한 진상규명을 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굉장히 안타깝다"라면서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다"라고 답했다고 백 교수는 설명했다. 또한 백 교수는 "문 대통령께서 '백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나뵙고 말씀을 많이 들었다, 술도 나누시고 집회 시위하실 때 늘 옆에서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이날 백 교수는 고인이 혼미한 와중에 남긴 마지막 말로
웹툰작가 윤서인 씨가 15일 별세한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조롱하는 뉘앙스의 글을 남겼다. 윤 씨는 이날 자신의 SNS에 백기완 선생 별세 소식을 전한 기사를 캡처해 올리고는 “코카콜라 마시면 민족정기가 썩는다는 분. 이분이 평생 통일운동에 헌신한 건 맞지. 그 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통일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 본인이 원하던 ‘그 통일’을 못 보고 죽은 게 한이겠네”라고 적었다. 이후 윤 씨는 댓글에 언론들이 ‘한국 진보운동의 큰 어른’, ‘민주화 운동의 큰 별 지다’ 등의 표현으로 올린 영상을 캡처한 화면을 게재하고는 “무슨 대단한 인물 가셨네 으이구”라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윤 씨의 해당 게시물에는 “간첩 하나 갔네”, “공산화 운동의 큰 별”, “평생 생산적인 일에 종사한 적 없는 기완이 잘 놀다 갔구나” 등 백기완 선생을 조롱하는 페이스북 유저들의 댓글이 달렸다. 이에 정철승 변호사는 “윤서인이가 오늘 작고하신 고 백기완 선생까지 모욕하고 조롱하고 있다는 제보 메일들이 들어오고 있다”면서 “댓글들을 보니 부화뇌동하여 고인을 욕보이는 자들도 많더군요. 그 모든 댓글들을 캡처해 보내주시고, 가능하면 댓글 작성자들의 인적사항들까지 알려주
‘백발의 거리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하늘의 별이 됐다. 민주화운동가로서 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백기완에게 있어 ‘통일운동’은 운명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8·15 해방 이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내려와 정착했다. 여덟 명의 식구가 남북으로 나뉘어 살게 되자 집안을 하나로 잇고자 하는 뜻에서 13살의 나이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초등학교만 다니고 독학으로 시, 소설을 읽고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워 영어 천재로 알려지기도 한 소년 백기완은 1948년 서울시 종로구의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뒤 고결한 뜻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60년, 4·19혁명에 뛰어들어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애썼으며, 1966년에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끝내기 위한 염원을 담아 재야 연합전선의 하나로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와 야권 통합운동을 성사시켰다. 1967년 당시 독립운동가 장준하와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탄압당해 무산됐고, 1972년에 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충무로에 개소했다. 백범사상연구소는 정부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문 닫기를 반복했고, 백기완 작가는 1976년
시대의 큰 별이 졌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통일운동가였던 진보진영의 원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학교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운명했다. 1932년 황해도 출생인 백 소장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 앞장섰다.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옥고도 치른 바 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장편시 '묏비나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 운동권의 일부인 '제헌의회파' 그룹의 추대로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바 있다. 당시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으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2년 독자 민중후보로 재야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재야에서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매진하는 동시에 9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시민운동 등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진보진영 원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중이었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 경기신문 = 유연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