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영
/홍일표
새를 연주하다가 손이 얼어붙었다 엎질러진 여자가 바닥에 흥건했다
운명이라는 말이 쓸쓸해졌다
누군가 칼과 총을 들고 왔으나 새가 아니어서 밤이 왔다
나뭇가지들은 고장 난 악기였다 부러지는 일만이 최선인
부러진 자리마다 다시 새가 돋아날 때까지
여자는 새와 꽃을 심장에 꽂고 살았다 죄 없이, 죄가 많은 식민지 같은
햇볕이 부족해서 여러 날 비가 내렸다
세월을 살다보면 누구나 희미한 그림자하나 품고 간다. 어설프게 설레던 새가슴도 새벽 산책도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여행은 얼마나 황홀한 불안인가. 네 귀퉁이가 너무 또렷한 숲길에서 슬프게 흔들렸던 날들, 나라는 새장 안으로 들어왔던 작고 여린 새 한 마리. 연주하려던 손은 얼어붙고 바닥으로 흥건하게 스며드는 여자가 있다. 품고 있는 열정과 이상만으로 새의 명쾌한 노래 소릴 들을 수 없다 날아와 앉은자리마다 부러지는 나뭇가지들 소용돌이치는 공기들 그곳에서 새가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쓸쓸한 운명이라고 흘려보낸다. 어느 날 문뜩 뼈저리게 파고드는 그림자 있어 가던 발길 멈추고 뒤돌아보는 공중이 흐릿해진다. 여러 날 비가 내리는 시인의 뜰에 배롱나무 꽃이 피고 새 한 마리 날아들기를. /정운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