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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고고학적인 상자

고고학적인 상자

/김관용

빈 곳을 찾을 수 없는 빈틈, 15층 베란다에 파를 심는다



모서리로 다가가 툭 건드리면 끈적이는 타액

싱싱한 것일수록 할퀸 상처는 오래 남는다지

발꿈치 아래서 돋아난 푸른 반점의 찌르레기, 그들의 눈물은 비료다



집안 공기는 모두 푸른 근육의 안쪽으로 몰려들고

피부의 바깥은 진공이 된 듯

스티로폼은 무언가 골몰하는 눈치다

바닥에 떨어진 얼굴에는 통증을 예감하는 낯익은 상형문자들, 보르헤스의 주석처럼

팽팽해지는 저녁



고집 센 파의 살, 파의 뼈, 잘린 손가락 그대로 암각되고 싶다

수식어가 빠진 문장처럼 혹은 유빙처럼

허공의 지층이 삐걱일 때 윗층의 기침소리 상자 속으로 구겨진다



파는 속이 비어서 허기진 식물이지만 그렇다고 대가 약해 마른 사랑에 기대지도 않아

후욱, 파의 관절이 꺾이는 날

한 술 더운 밥 위에서 단단하던 집착은 풀어지지



파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연두의 기운을 한 점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싱싱한 것일수록 할퀸 상처는 오래 남는다’는 말을 거꾸로 하면 ‘할퀸 상처가 오래 남는 것일수록 싱싱하다’가 된다. 상처 없이 싱싱할 수는 없으니까. 상처를 이겨야만 싱싱한 것이니까. 상처가 많은 세상에서 ‘상처가 없는 싱싱함’은 아직 상처를 모르는 어린 것이라 하겠다. ‘툭 건드리면 끈적이는 타액’, ‘고집 센 파의 살, 파의 뼈, 잘린 손가락’, 게다가 ‘속이 비어서 허기진 식물’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대가 약해 마른 사랑에 기대지’는 않는다. 이것이 싱싱한 비결일까. 할퀸 상처가 오래 남은 덕분일까. 그러나 상처는 상처, ‘관절이 꺾이는 날’에 ‘단단하던 집착’이 풀어진다. 이제껏 보여주었던 싱싱함은 상처를 숨기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풀어지지 않는 단단한 집착 하나쯤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생의 관절이 꺾이는 날이 도래해서야 풀어질 것이기에, 오늘도 묵묵히 ‘연두의 기운을 한 점으로 밀어 올리’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종섶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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