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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남계서원을 가다3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과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정여창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대부터 연산군대까지 활동했던 인물로, ‘일두(一?, 하나의 좀벌레)’라는 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겸손한 학자였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들어가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성종25년(1494)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조세로 인해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 ‘편의수십조’를 지어 시행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편의수십조는 백성이 마땅히 편하게 살아야 할 열 가지 규칙을 말한다. 정여창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진정한 현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종직의 제자였던 정여창은 1498년 무오사화를 피해가지 못하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54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하지만 중종반정으로 다시 복권되고, 선조1년에 문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함께 동방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나주의 경현서원, 합천의 이연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등 9여 곳에 이르며 그 중 가장 주된 곳이 이 곳 남계서원이다.

정여창과 함께 배향된 동계 정온은 영창대군이 죽자 그의 처형이 부당하다고 상소를 올려 10년간 제주도에 유배된 인물이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수치라고 하며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고향에 내려가 세속과 단절한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개암 강익은 이 곳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인물로 동계 정온의 외삼촌이다. 명종 4년에 진사급제를 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양성에만 매진한 인물이다.

사당으로 오르는 층층계단은 무척이나 가파르다. 호박돌로 4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당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층층계단을 오르면 3칸의 준도문을 만난다. 준도문 양 옆으로 사당을 에워싸는 담장이 이어진다. 준도문 앞으로는 150년이 넘은 배롱나무 4그루가 담장을 따라 서 있다. 배롱나무는 여름 내내 꽃이 시들지 않고 피어있어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기도 하고, 나무의 결이 희고 고와서 선비의 청렴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배롱나무의 꽃말은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여창 선생에 대한 제자들의 그리움도 담겨 있다.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사당의 엄숙함은 자취를 감추고 정여창 선생이 꽃이 되어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준도문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준도문을 지나면 사당내부로 들어서는데 정면에 사당이 오른쪽으로는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다. 세분을 모신 남계서원의 사당건물은 특이하게 이름이 없다. 서원에서 제향공간은 중요한 공간이다. 제향공간의 중심은 사당으로 사당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사뭇 궁금해진다.

낮은 기단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한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풍판을 단 모습이다. 겹처마로 된 사당에는 단청을 했으며 건물 앞쪽으로 원기둥의 툇간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로 오르는 계단은 좌우로 2개이며 계단 동쪽 옆에 관세대가 놓여 있고, 기단 위에는 정료대가 놓여있다. 정료대는 불을 피우기 위한 곳이며, 관세대는 제향의식을 행하기 전 손 씻을 대야를 받쳐 놓는 대를 말한다. 사당 중앙문 좌우로 툇간 기둥과 사당 건물의 기둥을 가로지르는 얇은 판이 설치되어 있다. 제향시 사당 안으로 음식을 들이기 전 이 판 위에 잠시 음식을 놓았던 자리이다.

사당 내부에는 정면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으로는 정온 선생을 동쪽으로는 강익 선생을 모셨다.

남계서원은 약 500여년의 시간동안 정여창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서원이다. 정여창 선생의 삶 중에 어떤 부분이 수백년을 이어온 원동력이 되었을까. 우리의 일상을 디지털 발자국으로 남기는 이 시대에 기록된 우리의 삶은 후대에 어떤 모범이 될까를 생각하니 정여창 선생의 삶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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