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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1972 데자뷰 2013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대신 나라의 중요 방송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중학교 1학년의 삶과 매우 동떨어진 딱딱한 발표가 교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선생님이 해주신 보충설명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과 북의 최고위층 인사가 서로 비밀리에 평양과 서울을 방문했다. 이제부터는 남북이 싸우지 않고 통일을 해 나가기로 했다.

얼떨떨했다. 바로 전달 6월에도 멸공통일 글짓기와 웅변대회를 하지 않았던가? 이승복 어린이를 무참하게 죽이고, 울진 삼척으로 무장공비를 내려 보내던 ‘북괴’와 어떻게 대화를 하지? 그게 말이 돼?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른들도 얼떨떨해 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단지 어른들은 왠지 안도하는 분위기였고, 약간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석 달 후엔 10월 유신이라는 게 선포됐다. 역시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른들 표정은 무거웠다. 중1 우리들 일상이 천지개벽할 일은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유신의 공포는 고등학생들도 실감한 정도였으나, 1972년에 무슨 일들이 일어난 건지 조리 있는 설명을 들은 건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선배들의 설명은 이랬다. 박통은 유신을 획책하기 위해 남북관계마저 악용했다.

아직 얼떨떨한 보통사람

7·4 공동성명은 73년 휴지조각이 되었으므로 앞뒤가 맞아 보였다. (북한도 그해 겨울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을 선포하고, 김일성 체제 강화에 나섰다는 건 아마 대학을 졸업하고 들었지 싶다. 남과 북 정권 모두 ‘우리의 소원’을 독재권력 강화에 이용했다는 설이다.)

72년으로부터 한 세대쯤 세월이 흘러, 남북관계를 연구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을 때 좀 더 깊은 내막을 들었다. 데탕트 국면에 들어간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대화에서 대결로 자세 전환을 촉구했다고 한다. 특히 대북관계에서 남한의 자율권을 전면 허용하지 않았던 미국이 상당한 폭의 자율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남의 10월 유신과 북의 개헌이 7·4 당시에 이미 예정돼 있었느냐는 것이다. 답은 구구 각색이다. 남북 모두 그렇다. 남북 모두 그렇지 않다. 남은 그렇고, 북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다. 어느 게 정답인지 아직 실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남북 모두 대결에서 평화로 전환할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41년이 흐른 2013년 현재 한반도의 보통사람들은 또 한 번 얼떨떨하다.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서로 전쟁불사를 외치지 않았던가? 아니, 바로 지난주까지 서로 삿대질을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어찌 되었건 일단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41년 전에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있게 그 내막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방중, 아베의 특사 이지마의 방북,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 북미 뉴욕 접촉 등등 여러 정황을 조합해 그럴듯한 설명을 만들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위키리크스가 또 비밀 외교문서 뭉치를 입수해 폭로하지 않는 한 다시 30년은 지나야 전모가 드러날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박근혜 정부가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을 펼친 결과, 북이 결국 무릎을 꿇고 대결에서 대화로 자세를 바꿨다는 식의 설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를 예전처럼 걷어차 버리는 우를 다시 한 번 범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자화자찬이건, 아전인수건 박수 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이제는 모두 집착 버릴 때

그동안 남한 진보는 7·4를 경멸했다. 보수는 6·15를 멸시했다. 7·4의 원칙과 6·15의 정신을 이번 기회에 동시에 되살리면? 물론 쉽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자기 해석에 집착하는 세력이 건재하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날리지 않으려면, 정권 차원에서만은 7·4성명과 6·15선언의 고갱이를 꼭 붙잡고 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왕 되살리는 김에 91년(보수정권 시절) 남과 북이 합의한 또 하나의 문건,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까지 되살리면 더 좋다. 마음이 없어 못 하지, 어려워서 못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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