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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몰락 간직한 천년고성 센강 굽어보며홀로꿋꿋하구나

테마여행가가 들려주는 프랑스
라 호쉬 기용(La roche Guyon)

 

일드프랑스 지역(Val-d’oise) 자치주의 유서깊은 작은 마을인 라 호쉬 기용은 노르망디로 흐르는 센강이 교차하는 전락적 요충지로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문지로 꼽힌다. 12세기에 노르망디 공작이 세운 성채에서 유래됐으며 인근에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안식처인 오베흐 쉬흐 와즈와 모네의 지베르니가 함께 위치하고 있다.

라호슈 기용은 유명한 성 뿐만 아니라 센강 인근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마을로 여러 화가들이 이 마을을 그림 속에 남기고 있으며 모네, 세잔, 브라크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모네의 작품인 ‘라호쉬 기용의 길’은 시각적인 효과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이런 빛이 보이는 시각을 주로 묘사하며 눈병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일본 도쿄의 서양화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프랑스인이 가장 선호하는 소도시
센강 계곡의 하얀 절벽에 박혀있어

절벽 속에 숨은 240개 계단 올라가면
성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 볼 수 있어

2차 대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이
노르망디 방어전 수행 사령부로 사용


라 호쉬 기용 성(Chateau de la roche guyon)

센강 계곡의 하얀 절벽을 벽 삼아 서있는 아름다운 성으로 프랑스의 매우 중요한 1000년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2세기 초에 건립된 성은 붕괴됐고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14세기에 새로 건설한 것이다.

오랫동안 ‘호쉬La Roche’ 가문의 소유였고, 2차 세계대전 기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이 노르망디 방어전을 수행하던 당시에는 공중폭격에 대비한 벙커가 설치된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절벽 위의 탑과 아래의 성은 절벽 속에 240개 계단을 통해 연결돼 있으며 센강과 주변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파노라마가 장관을 이룬다. ‘호쉬 La Roche’ 가문이 10~15세기 이 지역의 맹주였는데, 1185년 ‘필립 오귀스트 Philippe-Auguste’ 왕이 이 성에 머물면서 충성심에 대한 선물로 화물과 상품을 싣고 센강을 오르내리는 상선들에게 통과세를 받는 권리를 줬다.

백년전쟁 동안이던 1419년 영국군 손아귀에 떨어져서 다른 집안에 넘어갔다가, 1449년 다시 본래의 주인을 찾았다. 1739년부터 낡은 중세시대의 건물들을 개축 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제일 아래층 동쪽에 1740~45년 사이 건축가 ‘루이 빌라흐 Louis Villars’에게 마사건축을 맡기는데, 신기하게도 ‘샹티이 성 Chateau de Chantilly’의 마구간과 비슷하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는 반혁명군들이 이 곳을 점령해 저항할 것을 우려한 정부가 감시 탑인 ‘동종 Donjon’(원형탑)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절반정도 파괴돼 폐허로 남은 오늘날의 모습만해도 대단하니, 당시의 위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방어하기 위해 책임자로 임명한 롬멜 장군의 참모부가 1944년 2월부터 이 성에 정착해 사용했으며 당시의 주인이던 ‘라 호쉬푸코 La Rochefoucauld’ 가족들은 2층을 사용하고, 아랫층의 발코니가 달린 커다란 응접실을 롬멜의 사무실로 사용했다.

연합군의 공중폭격에 대비해 절벽을 파 들어간 동굴에 벙커를 만들고는 방탄용 문과 두터운 방어벽을 콘크리트로 건설해 사무실 및 탄약고를 뒀던 흔적이 남아있다.

전쟁 막바지인 1944년 초부터 롬멜 장군은 나치 정부가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직감, 프랑스 주재 독일군 총책임자인 ‘칼 하인리히 Carl-Heinrich von Stulpnagel’ 장군과 비밀스럽게 회동해 광란의 나치정부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모종의 합의를 했다.

다만,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데, 히틀러 암살 후에 시민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롬멜 장군의 반대로 ‘게쉬타포 Gestapo’의 감시망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으로, 뜻을 같이 하는 장교들이 몰려들어 나치정부를 성토하는 비밀 모임이 매일 일어났다.

1944년 6월 4일, 노르망디 연안에 폭풍이 몰아친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히틀러를 친견하고 자신의 부인 생일을 함께 보내고자 독일로 갔던 롬멜 장군은 독일의 ‘울름 Ulm’ 에서 연합군 상륙소식을 접하고는 부리나케 ‘라 호쉬 La Roche’로 되돌아 온다.

7월 17일 노르망디의 방어선을 순례하던 롬멜 장군의 지프차가 연합군 전투기 2대의 집중포화를 받고는, 운전수와 부관은 숨지고 장군은 허리를 심하데 다쳐 혼수상태에 빠진다. 5일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장군의 희망대로, 독일의 가족 곁으로 이송돼 병원치료를 받는다.

긴급한 상황인 만큼, 롬멜 장군의 후임자로 7월 19일 신속하게 부임한 한스 군터 장군은 히틀러 암살계획에 반대하고 결국, 7월 20일 히틀러 암살사건은 실패로 끝난다.

노르망디 연합군 진격으로 밀리는 전선에 대한 책임으로 8월 18일 한스 군터 장군이 자살을 함으로써, 사령관을 잃은 독일군은 이 성을 버리고 철수를 시작한다. 하지만, 8월 25일 독일군이 철수한 것을 모르는 연합군은 이 마을에 64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성은 8개의 폭탄을 맞고 완전히 폐허가 된다.

한편, 독일의 가족 곁에서 요양 중이던 롬멜 장군은 히틀러 암살 사건과 관련해 나치 정부로부터 10월 30일 가족을 전부 총살하는 대신 자살할 것을 강요 받는다.

정원과 채마밭(Jardin et potager du chateau)

이 성에 부속된 채마밭은 대략 3헥타르 면적에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2009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2월 1일~3월 28일 :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

3월 29일~10월 26일 :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10월 27일~11월 30일 :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12월 1일부터 다음해 2월 6일까지는 폐관

 

>>테마여행가 안완기는…

한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1992년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의 건축을 공부했으며, 특히 프랑스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에 빠져 들게 됐다.

그는 이 나라의 문화에 대해 감상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쉬움만 남기고 돌아서는 수 많은 여행객들을 보면서 프랑스를 제대로 느끼고 배우는 정직하고도 건강한 여행문화를 꿈꿨다.

지난 2003년부터 프랑스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홈페이지(www.algogaza.com)를 제작, 운영해 유용한 프랑스 여행관련 정보 및 자료를 꾸준히 올리고 있다.

<약력>

- 1986년 경희대학교 건축공학과

- 1992년 프랑스 유학

- 1995년 Strasbourg 건축학교 수학

- 1998년 Val-de-Marne Paris 건축학교 수학

- 2002년 프랑스 테마여행 전문 가이드

- 2006년 ‘알고가자 프랑스’ 테마여행사 운영

- 2014년 ㈜OECD 대표부 대외협력부 근무

- 2014년 9월~ ‘알고가자’ VIP여행사 창업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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