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일기(默齋日記)』는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이 41세 때인 1535년부터 죽던 해인 1567년까지 30여년간 쓴 개인 일기이다. 그 가운데 결실(缺失)된 것을 제외하고 17년 8개월분 10책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문건은 묵재일기 외에도 조선시대 사대부가 쓴 최초의 육아일기인 ‘양아록(養兒錄)’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그가 쓴 『묵재일기(默齋日記)』를 통해서 당시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사료들이다. 이 자료에는 부부간의 갈등은 물론, 하층민들의 생활 방식, 노비들과의 갈등, 양반들의 풍류(風流) 등 일반 백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양한 생활기록들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은 역시 건강과 질병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질병과 약재, 처방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질병 상황과 의료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이 의료시설이나 의원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개인의 질병은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할 만큼 의료 시스템은 열악했다. 그러므로 식자(識者)들은 스스로 의약과 치료법을 공부하여 자신
퇴계의 『매화시첩(梅花詩帖)』은 그가 남긴 100수가 넘는 매화시 가운데 62제(題) 91수(首)를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따로 묶은 역사상 유일한 매화 시집이다. 이 시첩에는 주로 퇴계가 중년 이후에 쓴 작품부터 타계하던 해인 70세 때까지 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퇴계는 특히 매화에 관한 시를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매화를 각별하게 사랑했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평소에 매화를 매선(梅仙)이라 부르고 또 매형(梅兄), 매군(梅君)으로 의인화하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매화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하다. 이렇게 끔찍이도 매화를 사랑한 데에는 물론 매화의 고고한 선비적 풍모를 경외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퇴계의 매화 사랑에는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바로 두향(杜香)과의 애절한 사연이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마흔 여덟살 때인데, 첫 부인에 이어 둘째 부인과 사별하고 아들까지 잃은 슬픔 속에서 퇴계는 두향을 만났다. 두향은 비록 관기(官妓)였으나 거문고와 시서화에 능했고 매화를 좋아하고 분매(盆梅) 솜씨가 좋았다. 당시 두향은 18살이었고 퇴계와는 30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은 신분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법전이다. 국가보물 1521호로 지정된 을사대전(乙巳大典)은 1485년에 반포되어 시행한 것으로 6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앞서 조선건국 시에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있었고, 태조 6년에 제정하여 시행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여 국가 통치의 기본틀을 법률로서 할 것을 천명하고 최항 등으로 하여금 당시 현존하던 고유법과 관습법을 성문화 하도록 하였다. 1460년 세조 6년에 1차로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고 착오를 점검하기 위하여 시행이 미루어 졌다. 이어 예종 때까지 수정을 계속하고 시행을 신중히 하고자 미루다가 성종 때까지 와서 수정을 더 거쳐 1474년 경국대전 호전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처음으로 호전(戶典)이 시행되었고 연이어 형전(刑典)과 나머지 네 개 법전이 완성되어 시행해 오다가 1481년부터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다시 보완작업에 들어가 1485년 1월부터 시행하게 된 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을사대전(乙巳大典)이다. 조선건국과 함께
아언각비(雅言覺非)는 다산 정약용이 1819년에 펴낸 우리말 연구서이다. 이 책은 우리말 중에서 잘못된 연원을 따져서 백성들의 언어생활을 바르게하기 위하여 이치에 맞지 않고 와전된 말들을 찾아 그 잘못된 뜻과 확실한 용례를 들어 설명한 국어책이다. 아언각비(雅言覺非)는 3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산이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양주의 집으로 돌아온 이듬해에 펴냈으니 지금부터 200년 전이다. 아언(雅言)이란 말은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나오는데, “공자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子所雅言)은 시와 서(詩書)이며 몸가짐과 행동은 예를 지키는 것(執禮)이었으니 이 모두가 평소에 하시는 말씀(皆雅言也)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 유학자 공영달은 이 ‘아언(雅言)’이란 말은‘바른말(正音也)’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말은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라는 뜻이니 오늘날‘표준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 비추어 ‘아언각비(雅言覺非)’는 일반 백성이 쓰는 언어가 이치에 맞고 뜻이 올바르게 소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 잘못된 것을 깨우쳐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음을 제호(題號)에서 보여주고 있다. 제1권에 소개된
조선 정조에 의해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4권 4책의 한문본과 1책의 언해본으로 구성돼 있는데 24가지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 훈련서이다. 현대 스포츠가 고대의 전쟁과 전투에서 출발한 것을 감안하면, 이 책의 24가지 전투 기술이 오늘날 무도 경기 종목의 원류임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 책의 편찬을 총괄했던 백동수에 관해서는 만화 ‘야뇌(野?=주릴 뇌) 백동수’나 드라마‘무사 백동수’를 통해 일반인에게 알려지고 따라서 ‘무예도보통지’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픽션을 가미한 흥미 위주의 드라마이다 보니 백동수에 관한 사실이 상당 부분 왜곡된 것도 있다. 백동수는 무신(武臣)으로 당대 최고의 무예 고수일 뿐 아니라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도화원 화가 김홍도 등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이덕무가 자신의 글에 대한 평을 그에게 부탁할 만큼 문무를 겸비한 선비였다. ‘무예도보통지’는 백동수가 총괄하고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가가 공동으로 편찬한 것으로 돼있으나, 이들 외에도 도화원 화원들이 대거 동원됐고 실질적으로는 정조가 직접 총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책에는 492판의 그림이 나오는데 그 공격 자세와 품세가 모두 백동수
조선 영조 때 사람 김천택(金天澤)은 평민 출신의 가인(歌人)으로 악론(樂論)에 통달하고 가객을 알아보는 눈이 밝았을 뿐 아니라 음악적 열정이 대단했다고 전해지나, 예인(藝人)이 천대받던 시대적 벽에 부닥쳐 그의 청아한 뜻은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런 처지에서도 당시 문인들의 개인 문집에 실렸거나 구비전승되어 오던 시조들을 모아 ‘청구영언(靑丘永言)’이라는 시조집을 펴냈다. 그는 발문에서 “우리 노래가 입으로만 읊어지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후세에 전하고자 기록한다”고 엮은 취지를 소략하게 밝히고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집으로 김수장이 펴낸 ‘해동가요(海東歌謠)’, 박효관 등이 펴낸 ‘가곡원류(歌曲源流)’와 함께 3대 시조집으로 일컬어진다. 청구영언은 그동안 원본이 미공개된 상태로 1948년 ‘조선진서간행회(朝鮮眞書刊行會)’에서 활자본으로 500부 한정 발행된 2차본만 세상에 통용돼왔다. 그러던 중 3년여 전에 ‘국립한글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통문관으로부터 원본을 사들였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고문서 자료들은 개인의 손에 들어가면 이해관계에 따라 자칫 해외로 유출될 수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글을 배우는 입문서로서 천자문이 널리 사용되어왔다. 오늘날까지도 한자(漢字)를 알든 모르든 대부분 사람들은 천자문이 무슨 책인지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교과서이다. 이 책은 원래 중국 양나라 주흥사라는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만들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해서 흔히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285년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먼저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천자문으로는 명필 한호(韓濩)가 쓴 ‘한석봉천자문(韓石峯千字文)’이 있지만 이밖에도 많은 판본의 천자문이 시대마다 지방마다 또는 집집마다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시대와 계층, 지역을 망라하여 천자문은 한자교육의 기본 입문서 이자 백성들이 말과 글을 배우는 첫 관문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교재였다. 왕가에서 세자나 대군들이 배우는 천자문은 비단이나 채색된 고급 장지에 당대 최고의 석학이 써서 만들었고, 사대부가나 일반 서민들은 주변에서 가장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