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바다이다. 그래서 바다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기이다. 오늘은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서산 마애삼존불을 뵙기 전에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불부터 만나보자. 돌무지 위에 우뚝 선 미륵불은 사람 키를 넘는 돌무지 위에 서 있어서 자연스레 우러러보게 된다. 얼굴은 사각얼굴처럼 각이 져 있고 양손은 얌전히 모은 채이다. 원래부터 이 미륵불이 여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길목에 모셔놓은 것으로 봐서 민간 신앙화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미륵불이 서있는 자리는 백암사 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이 근방에는 절이 99곳이나 있다가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부근의 절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미륵불에 합장을 한 뒤 본격적으로 서산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길을 올라가자.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숨이 차 오를 때쯤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암벽 한 가득 세 분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세 분 모두 볼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머금은 미소는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밝다. 그러면서도 인자함이 묻어나고 있어 ‘백제의
해인사를 갈 때마다 해인도를 합장을 하며 돌게 된다. 꽤 긴 코스를 합장을 하며 걷는 것은 무엇인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동시에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힘이 생기는 듯하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해인사 여행을 완성할 겸, 팔만대장경을 품은 해인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해인사에서 가장 중심인 건물은 대적광전이다. 보통 중심건물은 대웅전이기 마련인데 해인사에는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적광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다. 이곳 대적광전에는 6개의 주련이 있는데 2개는 고종이, 나머지 4개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쓰셨다. 오른쪽 2개가 고종이 쓴 주련인데, 한자 한자 또박또박 힘주어 쓴 것이 느껴진다. 흥선대원군이 쓴 주련 중에는 ‘처처칭양불공덕’이라는 주련이 특이하다. 이 주련은 ‘곳곳에서 부처님 공덕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첫 번째 글자와 두 번째 글자가 같은 글자이다. 그런데 실제 주련에는 같은 글자가 아닌 이수변(?)이 대신하고 있다. 같은 글자를 두 번 쓰기 귀찮았던지 흥선대원군은 같은 글자라는 의미로 이수변(?)으로 처리한 것이다. 참으로 흥선대원군다운 호방함이 묻어난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찾았을 정도로 유서 깊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66주년이 되었다. 전쟁은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앗아간다. 문화유산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은 전쟁 속에서 목숨을 걸고 문화유산을 지킴으로써 지금 우리 시대에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간직하게 해준 김영환 장군의 이야기가 담긴 해인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주차장에 차를 대고 20~30분을 더 올라가면 해인사에 도착을 한다. 주차장에서 해인사까지 오르는 울창한 숲길에 커다란 공적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이다. 공군조종사 하면 ‘빨간 마후라’를 떠올리게 되는데, 공군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처음 도입한 사람이 바로 공적비의 주인공인 김영환 장군이다. 김영환 장군은 한국 공군 창설 7인의 멤버 중 한 명이다. 해인사로 들어서는 초입에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가 자리한 이유는 6·25전쟁당시 항명을 택함으로써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6·25전쟁당시 김영환 장군은 가야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1개 대대를 섬멸하기 위해 이들의 주둔지인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폭탄하나로 날려버릴 수 없어 폭탄을 해인사가 아닌 해인사 뒤편에 투하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인사동이라는 이름에는 왠지 모를 설레임이 담겨있다. 맑고 쾌청한 날은 쾌청한 데로, 날씨가 흐리면 흐린 데로 그 나름대로의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사동이다. 거리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인사동은 많은 외국인이 찾는 관광명소가 된지 오래다. 오늘은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인사동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인사동여행은 안국역에서 가까운 북인사 마당에서 출발해보자. 북인사 마당에 인사동관광안내소가 있으니 인사동 관광지도를 한 장 받아들고 출발하는 것도 좋다. 북인사 마당에서는 ‘북인사 물길’이라는 상징물을 만날 수 있다. 이 상징은 두꺼비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으며 북인사 마당에서부터 시냇물이 흐르듯 물길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상징화시켰다. 북인사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쌈지길이 나타난다. 쌈지길은 인사동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쌈지길이 탄생하기 전 인사동의 랜드마크는 수도약국이었다. 랜드마크 자리를 내준 수도약국은 아직도 쌈지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쌈지길은 12개의 작은 가게를 살리는 일환으로 시민들과 인사동 상인들이 함께 노력해 탄생한 결과물이다. 쌈지길은 오솔길들을 따라 정상에 오르듯, 작은 가게들을 길로 연결해 사람들이 모이고
한 때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그 광고는 어쩌면 우리들 마음 속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부자에 대한 열망을 대변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부자하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집이 있다. 바로 경주의 최 부잣집이다. 경주의 최 부자는 어떠한 이유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회자되고 있을까. 오늘은 최 부잣집이 있었던 경주 교촌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경주 교촌에서 가장 먼저 들려볼 곳은 당연히 최 부잣집이다. 집 앞 안내판에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로 1789년경에 세워진, 200여년이 훌쩍 넘은 경주 최씨의 종가이다. 부자 집 치고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것에 놀라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 99칸이었던 규모는 현재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 등의 일부만 남아 있다. 최씨 고택에는 최 부잣집의 가훈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들 가훈들은 경주 최 부잣집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가훈들이다. 그 중 눈에 띄는 가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안 되는 가훈이다. 하지만 이 가훈은 벼슬에 대한 과욕이 자칫 멸문의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알고 미연에 방지하고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로 조용하던 산사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오색연등도 화려함을 뿜어내고 있다. 석가탄신일을 기념해 오늘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명승고찰, 수덕사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삼국유사에 백제의 사찰이 12개나 등장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수덕사가 유일하다. 서기 600년 백제 무왕 1년에 대웅전을 창건하고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만 전해오고 있지만, 수덕사는 말 그대로 덕을 닦는 사찰이며 덕을 숭상하는 산에 있다. 수덕사에서 닦는 덕이 무엇인지는 대웅전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알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보는 것처럼 무한히 뻗은 산줄기가 한 눈에 펼쳐지는데 실로 기막힌 전경이다. 신라 부석사에서 이를 ‘극락’이라고 표현했다면 수덕사에는 이를 ‘덕’이라 표현했다. 수덕사의 백미는 대웅전이다. 수덕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은 국보49호로 고려 충렬왕 3년인 1308년에 세워진 것이다.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정하
5월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5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많은 축제들이 있지만 오늘은 주먹도끼를 비롯해 구석기시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연천전곡리 구석기축제로 여행을 떠나보자. 연천전곡리 구석기축제에서 단연 관심있게 봐야 할 것은 주먹도끼이다. 주먹도끼는 ‘모양이 우리의 주먹처럼 생겼다’, ‘주먹에 쥐고 사용하는 도구’이라는 의미에서 주먹도끼라 부른다. 생김새가 주먹도끼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한쪽은 송곳처럼 가늘고, 다른 면은 뭉뚱한 편이다. 어떤 주먹도끼는 뭉뚱한 면이 일부러 갈아낸 것인지, 아니면 손을 많이 타서 매끄러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주먹도끼는 전체적으로는 약간 타원형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좌우대칭의 형태를 띤다. 주먹도끼는 거의 100만년 동안 사용되어진 구석기시대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맥가이버 칼에 비유된다. 그만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사냥한 사냥감의 가죽을 벗겨 내거나, 가죽에 구멍을 뚫거나,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빻을 때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주먹도끼를 만들 때 사용하는 뇌의 부위는 말을 할 때 사용하는 뇌의 부위와 유사하다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 간 방치되었던 경복궁이 다시 우리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종시기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인플레이션 유발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덕분에 지금 우리는 경복궁이라는 문화유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고종과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운현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보통 궁궐은 왕이 살면서 정치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운현궁은 ‘궁’으로 불리고 있지만 궁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운현궁은 왜 ‘궁’으로 불리는 것일까? 이는 고종이 26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왕의 잠저, 즉 왕이 살았던 집이라는 이유로 ‘궁’의 명칭을 받게 된 것이다.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의 집으로 그의 아들 고종이 태어나 12세까지 자란 곳이다. ‘운현’은 조선시대 기상관측소인 서운관 앞 고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고개 너머에 흥선 대원군의 집이 있었다. 운현궁은 수직사,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등의 중심건물과 유물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현궁으로 들어서자마자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수직사이다. 수직사는 지금의 경호실과 같은 곳이다. 즉 수직사는 경호원들이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위해 거처하던 곳이다. 운현궁으로 들
경복궁 야간관람은 그동안 경회루까지만 가능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왕의 사무실인 ‘사정전’과 왕의 침전인 ‘강녕전’ 그리고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시간여행도 구중궁궐 깊숙한 곳까지 이어서 떠나보기로 하자. 궁궐은 크게 왕이 신하들과 일을 하는 공간인 외전과 가족들과 생활하는 내전 영역으로 나뉜다. 지난 번 외전영역을 여행한 것에 이어 오늘은 내전 영역으로 출발해보자. 내전에서 처음 만나는 곳은 ‘강녕전’이다. 강녕전은 왕의 침실이다. 하루 종일 정무에 시달렸던 왕이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인 셈이다. ‘강녕(康寧)’이라는 이름은 오복 중 하나로 왕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기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원은 강녕전 뒤뜰에 있는 굴뚝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강녕전 굴뚝은 무심코 지나치면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구분하는 담장에 기대어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담장의 일부로 착각하게 만든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 양옆으로 각각 1개의 굴뚝이 있는데 굴뚝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 ‘천세만세(千世萬歲)’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강녕전 굴뚝을 지나 왕비의 침전인 교태
봄과 함께 경복궁의 야간관람이 3월 2일 시작되었다. 경복궁 야간관람의 경우 암표 단속까지 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매번 너무 빨리 마감되어 표를 구할 수 없다는 지인들의 하소연이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은 야간관람이 한창인 경복궁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경복궁 이야기를 하다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경복궁에 대한 자긍심이 없음을 느낀다. 자금성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특히나 심하다. 자금성의 크기에 비하면 경복궁은 명함도 못 내민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 따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기도 자금성보다는 작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12년 먼저 짓기 시작했다. 경복궁은 1395년에 지어졌다. 그러나 자금성은 1407년에 짓기 시작하여 14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그렇다면 왜 먼저 짓기 시작한 경복궁인데 크기는 그렇게 차이가 날까? 이는 건물을 짓는 우리 조상들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창건에 앞장섰던 정도전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백제불기」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