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고나다의 영화 ‘애프터 양’은 기이한 작품이다.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 과거를 사변하려 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거기서 뭔가를 얻으려 하거나 또 실제로 얻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미래 얘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곧 현재의 이야기다. 그건 알렉산더 와인스틴의 원작 단편 ‘양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기(Saying Goodbye to Yang)’가 직시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것, 그렇게 성찰하는 것, 바로 SF영화와 문학의 지향점이다. ‘양’은 안드로이드다. 그런데 가족과 진배없다. 아니 그냥 아들이다. 제이크(콜린 파렐)와 카이라(조디 터너 스미스) 부부는 서로를 비교적 열렬히 사랑하지만 아이가 없다. 그래서 입양을 한다(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입양을 했었을 수도 있다). 중국인 아이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다. 이들 부부는 아이가 일찌감치 자신들의 혈육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제이크는 백인, 카이라는 흑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둘은 아이가 자신의 중국쪽 토대를 잊지 않게 하려고 보육교사 겸 아이 돌보미를 집안에 들인다. 그게 중국계로 보이는 ‘양(저스틴 민)’
‘범죄도시 2’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영화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단기간에 천만 관객을 모은 것에 대해서도 하등의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극중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아들과 납치된 남편의 여자 역(박지영)에 대해 일체의 말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이상하게 생각한다. 박지영이 참 잘했다.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런데 포커스는 마동석에게만 맞춰져 있다. 최귀화나 박지환 같은 배우 등등 남자 배우들에게만 맞춰져 있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극중 캐릭터나 배우들의 평가에서 불평등한 점이 있다는 얘기이고 다소 쏠림 현상이 보인다는 얘기이다.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범죄도시 2’의 매력은 양가적(兩價的), 곧 이중의 가치에서 찾아진다. 우파들은, 다소 폭력적이긴 해도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는 데다 후배들이나 자기 경찰서 식구들은 무조건 감싸고 보는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에 매료될 것이다. 남자라면 역시 저렇게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며 침을 흘릴 것이다. 극중 주인공 형사 마석도(마동석)는 ‘수사권이 없으니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징징대는 베트남 영사관 직원에게 말한다. “아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보호해야지 누가 합
극장가에서 조용히 종영을 준비 중인 프랑스 영화 ‘파리, 13구’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하나는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 자크 오디아르의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뜻밖에도, 꽤나 야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된 모티프는 섹스이다. 영화 속 섹스가 이유가 없으면 그건 외설이자 포르노이다. 이 영화에서의 섹스는, 잘 들여다보면, 다들 이유가 있다. 섹스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 존재의 증명이자 관계의 증명이다. 영화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중국계 여성 에밀리(루시 장)에게 있어 섹스는 사랑의 강렬한 도구이다. 룸메이트인 흑인 남성 카미유(마키타 삼바)는 에밀리를 처음엔 그저 섹스 파트너로 생각한다. 그건 에밀리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에밀리는 카미유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섹스의 표현에 있어서 거침이 없다. “네 거를 빨고 싶어”, “뒤에서 박아줘” 등등의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에밀리는 보통 때도 옷을 잘 입고 있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에밀리는 옷을 홀딱 벗은 채 소파 위에 앉아 노래방 마이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반면에 카미유는 비교적 점잔을 떠는 편이다. 그는 임시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그래서 밤과 낮이 좀 다르다
어린이들을 다룬 일종의 아동영화들은, 놀랍게도 상당히 폭력적인 작품들이 많다. 벨기에 산(産) 영화 ‘플레이그라운드’는 특히 그렇다. 70분 남짓한 이 짧은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두 아이가 겪는 학교 폭력의 얘기를 다룬다. 사뭇 끔찍하고, 진실로 걱정되며, 어쩔 수 없이 반성의 기분을 갖게 만든다. 아이들의 문제란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냈거나 방치한 문제이고 따라서 어른들이 해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플레이그라운드’를 조금만 보다 보면 촬영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신예 감독 로라 완델의 카메라는 아이들의 머리 위 이상을 웬만해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극중 성인 캐릭터는 대체로 웨스트 언더 숏(waist under shot)이다. 성인들은 도무지 허리 위가 나오지 않는다. 인물들을 롱 숏이나 풀 숏으로 담을 때도 성인 캐릭터는 포커스 아웃시켜서 흐리게 나오게 한다. 그들의 얼굴과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대사는 보이스 오프(voice off)로 처리되는 식이다. 목소리만 나온다는 얘기다. 성인 캐릭터의 얼굴이 나오는 것은 이들이 주인공 아이들에게 몸을 낮춰 대화를 할 때 만이다. 아빠가 등굣길에 아이와 눈을 맞출 때, 혹은
일요일 꼭두새벽,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 씨가 각각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진부하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마침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틀째 사전투표를 마친 날이다. 한국은 정말 정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요원하다는 생각. 아마도 다들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를 비롯해 한국 사람들의 개인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확대 발전하고 있는데 그 개인들의 역량을 담아낼 국가나 사회와 같은 체제의 용기(容器)는 매우 부실하다. 걱정은,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과연 이런 분위기가 오래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몇 번을 얘기하지만 아베 이후 일본 영화는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신성(新星)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오죽했으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명장(名匠)이 한국에 와서 한국영화를 찍겠는가. 일본 자국(自國) 내 침체된 분위기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이 읽히는 부분이다. 고레에다는 한국 영화사와 《브로커》를 찍었고 그 주인공이 송강호이며 송강호가 이번에 남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한국영화와 한국의 배우가 아시아형 영화의 정체
핀란드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이 칸영화제 등 여러 나라에서 수상한 가장 적극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고전주의 때문이다. 특히 신인 감독이 만든 작품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올리 마키’는 2016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탔다. 이 상은 그 해 가장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작품과 감독에게 주는 상이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2008년 19분짜리 단편 ‘로드마커스’로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수상하며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던 감독이다. ‘올리 마키’는 사실상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제 관객과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건 그의 형식주의다. ‘올리 마키’는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로 찍혔으며, 코닥 필름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되면 제작 과정이 매우 복잡해지는데, 필름으로 찍은 것을 다시 디지털로 전환해 가면서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필름 촬영 – 현상 – 디지털 전환’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러기 위해서는 현상소가 있는 베를린과 디지털 작업을 위한 브뤼셀 등을 오가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필름을 구하기 위해 코닥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잔고 물품을 공수해야만 했다.
다큐멘터리는 종종 선동(煽動)을 한다. 그 안에 종종, 아니 자주 강한 주장을 넣는다.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그렇다. 옳고 그름이 정확하게 판단되지 않았을 때 더욱 그런 경향성을 보인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얘기는 다 헛소리이다. 다큐멘터리가 그렇지 못한 건 사람 자체가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계급성을 지니며 당연히 당파성을 지닌다. 다분히 진영논리를 추구한다.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내심의 선택’이 강하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것, 이 말을 이 다큐에 대해 말할 때 쓰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는 저잣거리의 쓰레기 같은 말이 돼버렸다. 이쪽, 저쪽 ‘이놈 저놈’이 함부로 막 갖다 쓰면서 공정은 가장 공정하지 않은 말이 돼버렸다. 오죽했으면 ‘공정주의자’란 말이 생겼고 선택적으로 공정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 됐겠는가. 조국 다큐 ‘그대가 조국’은 태생부터 논란을 안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파에서는 이를 자기변명을 위한
미국인 평론가 달시 파켓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난 30년간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평론 일과 저널리스트 일, 무엇보다 한국영화 자막 번역가 일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솔직히 한국말보다는 한글을 아주 정교하게 쓰고 사용하는 미국인이다. 한국말은 약간 어눌한데(30년을 살았음에도!) 글을 쓰는 데 있어 마침표 하나, 따옴표 하나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완벽하다. 그가 작업한 ‘기생충’ 영어 번역은 감독 봉준호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서는 데까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국적은 미국으로 한국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 강북 어디메쯤에서 산다. 그 역시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국 아버지,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다. 나는 그에게 늘, 너의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근데 이미 늦었다.) 부모가 살고 있는 보스턴 외곽으로 보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국에서의 입시가 다소 너무 강고(强固)하다고 생각하는 터라 미국인인 그마저 그걸 고스란히 떠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걸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 특유의 특혜이자 특권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를 10년 넘게
가수 정태춘은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무엇보다 귀에 꽂히는 가사가 먼저 기억되는 인물이다. 진부한 표현으로 음유시인이란 소리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그는 거의 독보적이다. 정태춘만큼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이는 싱어송라이터는, 한국에 없다. 그의 초기작 ‘시인의 마을’의 가사는 일찍부터 그가 범상치 않은 뮤지션이라는 것을 알렸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그렇게 시인처럼 등장했던 정태춘은 곧 세상과 시대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떠나가는 배)’,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92년 장마 종로에서)’가 그랬다. 그러나 ‘아치의 노래’와 ‘건너간다’라는 노래를 발표할 즈음인 2002년 이후 그는 파업과 농성의 현장에 자신을 더 투신했고 그렇게 대중에게서 잊혀 갔다. ‘건너간다’의 가사가 그걸 암시했다. ‘흔들리는 대로 눈 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우리는 언제까지 홍상수의 영화를 기록해야 하는가. 그 기록의 행위는 기쁨과 환희인가, 아니면 고통인가, 혹은 지루함인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아니고 혹시 깨달음, 통찰 같은 것은 아닌가. 이번 신작 ‘소설가의 영화’는 통산 그의 32번째 작품(단편, 다큐 참여 포함)이고 그건 그가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26년간 거의 매년 한 편 혹은 두 편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상수처럼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 내는 마에스트로급 감독은 한국에도 유럽에도 미국에도 없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막 영화 한 편을 끝내고 회식 비슷한 자리에서도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아, 영화 찍고 싶어”. ‘소설가의 영화’는 최근의 전작과 이어질 듯 말 듯 한다. 인물들이 그렇다. ‘소설가의 영화’의 주인공 준희(이혜영)는 바로 직전의 작품인 ‘당신얼굴 앞에서’에 나오는 상옥(이혜영)일 수 있다. 상옥은 오랜만에 귀국해 동생 정옥(조윤희)의 집에서 살아간다. 그녀는 그때 영화감독 재원(권해효)을 만나게 되는데, 감독은 그녀의 이런저런 삶의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에게 하루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