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가 가깝게 바라보이는 백령도 남쪽 해변가. 주변 산세에 둘러싸여 아늑한 대지의 품에 터를 잡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장촌 마을. 행정구역상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남포1리에 속한다.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랜 역사가 있는 마을로 3면이 산이며, 앞쪽으로는 바다와 접한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2021년 1월 기준 117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지만 1970년대는 600여 명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까? ▶ 장촌(長村) 그리고 남포리(南浦里) 지명 유래 장촌 마을은 뒤쪽이 석장골산 일명 뾰족산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앞(남쪽)으로는 석장골산 밑에서 시작된 개울이 해안까지 마을 중간을 흐르며 개울 좌우 편평한 대지에 가옥들이 자리한다. ‘장촌’이란 지명은 해안으로 길게(長) 분포된 집들로 마을(村)이 형성됐기 때문이며, 경작지도 간척에 의해 넓게 분포한다. 혹자는 ‘장촌’이란 지명 유래가 장씨의 집성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내용이며, 촌락의 분포와 관련된 것이다. 옛날에는 마치 삼태기와 같은 지형이라 하여 ‘삼치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의 행정구역명인 ‘남포리’ 명칭은 조선 광해군 때 백령진(白翎鎭)이 재설
▲오전 8시30분 찾아가는 현장 시장실/ 옹진군
내남적 없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없이 식솔을 거느리며 사는 것이 그리 녹녹치 만은 않다. 어느 한 날 하늘에서 금은보화가 뚝 떨어지는 일 없겠지만 격동기 숱한 어려움을 견디며 산 세대들은 참으로 ‘산다’는 것이 버거웠을 것이다. ‘자수성가’란 말도 그런 사람들이 넘치지는 않고 그런대로 근근이 산,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쓰이는 말인가 싶다. 한 가정을 꾸미자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집,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월세, 전세를 거쳐 자가(自家)를 만드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옮겨 다닌 집, 즉 이사를 아홉 번 했었다. 인천 미추홀구 주안7동으로 이사할 때가 1980년 초, 꼭 5번째였다. 후론 내리 20년을 거주한 곳이다. 일명 신기촌(新基村), 원도심 도시계획에 의해 이주케 된 곳으로 무심코 들으면 기지촌(?)으로 들릴 수 있는 변두리 중 상 변두리였다. 좋은 말로 한다면 산(승학, 231m)으로 병풍 친 곳이라고 하지만 그 산 끝자락은 해방 전, 후로 사용된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그 때, 휴일이면 그 산을 등산이랍시고 오르내리게 되었다. “주안묘지(朱安墓地) 산비탈에도 밤버레가 우느냐.” 김광균의(金光均)의 시집
백령도 흰(白)고구마 상강(霜降)을 전후한 요즘 밭마다 고구마 캐기에 여념이 없다. 옹진군 백령도에도 중화동을 중심으로 전역이 고구마 캐기가 한창이다. 백령도에서만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흰(白)고구마. 일명 호(胡)감자. 백령도에서는 ‘땅속의 과일’이라 할 만큼 맛이 달아서 ‘땅 지(地)’, ‘과일 과(果)’를 써서 지과(地果)라 부른다. 백령도에서 논농사에 벼(Oryza sativa, 赤神力)를 심은 시기는 1930년대, 밭농사는 1960년대까지 조(粟) 농사가 주를 이뤘다. 물론 이 때는 간척 이전의 협소한 농경지이며, 초보적 영농 기술 상황에서 식량 사정이 어려워 긴긴 겨울밤 허기를 달래기란 힘들었다. 이 때 준비된 지과, 백고구마가 효자였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이 호감자는 해안가에 흙과 자갈이 섞여 다른 곡식은 심을 수 없는 땅에서도 수확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거름을 많이 줘야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돌이 오줌을 싸서 더 잘된다는 말이 날 정도로 잘되던 작물이다. 백령도란 지역사정상 척박한 땅에 구황작물로 흰고구마가 으뜸이었던 셈이다. ‘옹진군 향리지(甕津郡 鄕里誌 1996)’에 의하면 “1904년 경 중국인들이 백령도와의 무역에서 물물교환으로 얻어
수도권을 대표하는 인천 소래포구축제가 3년 만에 재개돼 오는 11월 21일까지 온·오프라인으로 개최된다. 저녁 시간 행사장을 찾은 시민들이 조형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관련 기사 15면 ( 사진 = 남동구 제공 )
▲오전 9시30분 제15회 자랑스러운 공무원상 시상/ 시청 대접견실 ▲오후 4시 제3연륙교 300리 자전거 이음길 선포 및 협약식/ 정서진
인천하늘고등학교 개교 10주년 기념식과 생전에 학교 설립을 주도한 고 이채욱 전 인천공항공사 사장(2019년 타계) 흉상 제막식이 21일 영종 하늘고에서 열렸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오전 8시30분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시청 재난상황실 ▲오전 9시30분 코로나19 대응상황 일일점검 회의/ 시청 재난상황실 ▲오전 10시 산단 산업문화공간 대개조 연구용역 중간보고회/ 시청 소접견실
‘Edward James Moffett’. 한국명 ‘부영발(傅永發)’ 신부는 백령도 현대사나 천주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혹자는 백령도에서 ‘공적비’라도 세워야 할 현대인 3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추천한다. 그가 천주교 선교를 목적으로 펼친 의료, 교육, 식량 및 의류 지원이 6⋅25 전쟁 이후 백령도 지역의 빈약한 경제 상황에 대한 주민의 요구와 맞아 지역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면에서는 백령도에서 종교의 외적 성장 기반을 마련한 계기가 됐는데, 그렇다면 부영발 신부와 백령도와의 인연, 그리고 백령도 지역주민을 위한 활동 내용은 무엇이 있을까? 아직도 백령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부 신부, 그가 한 일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과 인연 맺기 부영발 신부는 1922년 미국 뉴저지(New Jersey)의 뉴와크(Newark)에서 출생했다. 1941년 뉴와크의 대교구(大敎區) 내 달링턴 예비신학교에 입학했고, 1948년 사제(司祭)로서 서품을 받고 미국 Maryknoll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중국 광시성에 배치돼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약 3년 정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50년 중국 공산주의자(임표, 중국공산당 제4야전
제3회 국제치안산업박람회가 20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막한 가운데 한 경찰관이 가상현실에서 교육·훈련을 할 수 있는 장비의 시연을 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