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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대탐험] 4.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

 

 

고구려는 700년 동안이나 중국을 위협한 위대한 ‘성의 나라’이다. 중국 내 강변을 끼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고구려성이 존재하고 있다.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위치 선정과 자연절벽을 이용한 방어위치 선정, 옹성과 치를 비롯한 체계적인 방어구조물 등은 한마디로 천하의 요새, 바로 그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한 고구려의 성벽이지만 당대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구려성을 넘지 못했다.

 

특히 고구려성은 중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한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700년 고구려 역사의 증인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700년 역사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이러한 증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태자하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지만 1천500년 전 이곳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천하를 풍미했던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말발굽 소리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아 부활의 시기를 고대하고 있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고구려 석성의 기원
2.천혜의 요새 봉황산성-환도산성
3.평지토성 국내성-하고성자성
4.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
5.역사왜곡의 현장
6.훼손되는 고구려 유적지
7.연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8.구리의 아차산성

 

 

 

 

 

 

 

고구려의 평지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돌과 흙으로 쌓은 토성도 있다.

그러나 산세를 이용한 토성의 경우 1천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화작용 등으로 인해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특히 산성의 경우 발굴을 하면 할 수록 중요 유물이 많이 나오자 중국측이 출입을 통제한 채 몇 년 째 발굴작업을 진행중인 곳도 있어 국내 관광객들이 찾아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주몽의 혼 凍上에서 꿈틀꿈틀

◇신성(新城)

요녕성 무순시(撫順市) 고이산에 있는 고구려 초기의 토성으로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도 불린다. 몇 년 전만해도 고이산 입구에 남아있던 성문과 성벽의 흔적을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산 정상에 오르니 무순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으로는 텐산산맥을 따라 내려온 강과 도로가 끝없이 이어지고, 뒷편으로는 마을이 있어 한눈에 봐도 천연요새다.

신성의 동쪽에는 혼하(渾河)의 지류인 무서하(撫西河)가 흐르고, 남쪽 2㎞에는 혼하가 흐른다. 산성의 남쪽에는 제3현도군의 소재지로 추정되는 평지토성인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이 자리잡고 있다.

고이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에서 세줄기의 산능선이 남으로 뻗쳐 두 개의 천연적인 산간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신성은 그 산 능선에 토축 혹은 토석혼축의 성벽을 쌓아 동성(東城)과 서성(西城), 남성(南城)으로 구성됐으며, 동성이 중심 성이다. 남동·북서쪽은 위성(衛城)으로 축조됐다.
 

 

 

 

동성에는 동·남·북쪽에 3개의 문이 있으며 남문에는 옹성(甕城)을 만들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외부 성벽의 총 길이는 약 4㎞ 정도이며, 성벽의 축조방식은 산능선을 따라 먼저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채워 덮은 방식이다. 이 때문에 산성의 흔적은 풍화작용으로 인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성 안의 서쪽 비탈에서는 연꽃무늬기와막새, 수키와, 노끈무늬가 있는 암기와 등의 건축재료와 쇠활촉·쇠삽·쇠도리깨 등의 다양한 유물이 발굴돼 고구려 철제도구들의 발전수준을 알 수 있는 유적지이다.

신성은 요동에서 고구려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613년부터 6차례에 걸쳐 수와 당의 침략을 받았지만 다섯 번이나 물리쳤다. 667년 함락 전까지 가장 강력한 방어선으로 손꼽혔다.

신성의 초축시기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294년(봉상왕 3) 신성에 태수가 파견됐고, 335년(고국원왕 5)에 신성 축조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대략 4세기 초에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47년(양원왕 3) 7월에 신성을 수리한 기록도 남아 있다.

현재 성벽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동성 내에는 인공적으로 단을 지어 만든 넓은 대지가 있고, 남위성의 남쪽 능선 정상에는 요(遼)·금(金) 대의 백탑이 남아 있다.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

요녕성 무순시에 있는 3성급 우의호텔 자리가 옛 고구려 토성인 노동성터이다. 성터는 우의호텔과 맞은 편 노동공원을 포함한 남북주향의 산 언덕 위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주위로 고층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서 산이라기 보다는 도심속의 공원이다.

성터 옆으로는 혼하(渾河)가 무순시 중심으로 흐르고 있으며, 높은 강 언덕은 천연성벽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규모는 남쪽 성벽 291m, 북쪽 성벽 150m, 동쪽 성벽 285m, 서쪽 성벽 291m로 장방형의 성터였으며 흙으로 쌓은 성벽의 밑 넓이는 7m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북문이 있었다는 자리에는 무순시 인사국 4층 청사가 들어앉았고, 성터였던 노동공원 안에는 인공늪이 조성돼 인근 주민들이 즐겨찾는 유원지로 전락했다.

‘요녕사적자료’와 ‘동북역사지리지’를 보면 노동공원 성터가 현도군의 세 번째 소재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주변 부족들과의 결속을 통해 강대해진 고구려가 중국과 전쟁을 벌여 압록강 유역에 설치됐던 현도군을 흥경으로 쫓아낸데 이어 또 다시 서쪽의 요동 무순방면으로 몰아내 고구려의 세력권이 서쪽으로 더욱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중국 세력에게 빼앗겼던 옛 고조선의 영토가 다시 우리 역사의 무대가 됐음을 의미한다.

◇구련성(九連城)

단동시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구련성은 명·청 때 국경을 건너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통상요지였다. 220여년전 연암 박지원이 조선의 사절단 300여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최초로 밤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평지성인 구련성 안의 넓이는 0.54㎢였다 하니 제법 규모가 큰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련성은 청나라 때부터 빈 채로 방치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해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성터의 흔적을 찾다 못해 길가던 중국인에게 물어보니 “예전에 동네 작은 산에 토성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거의 무너졌다”며 표지석이 세워진 곳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 한 귀퉁이에 세워진 ‘구련성고성지’(九連城古城址) 표지석에는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다는 문구가 적혀있으나 보존을 제대로 하지 않아 온통 먼지로 뒤덮혀 있었고 모서리 곳곳이 훼손된 상태다.

표지석의 뒷면에는 금(金)나라 이후 유지된 사적과 원(元)을 거쳐 명·청시대에 중국과 조선의 통상요지(通商要地)요 병가(兵家)의 필쟁지지(必爭之地)라 하여 그 상업적·군사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성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데다 표지석 마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으니 국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이곳은 중국 동북공정의 종착점이 될 수 있는 곳으로 다음회 역사왜곡 현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

요녕성 심양시에서 동북쪽으로 약 35㎞ 떨어진 휘산 풍치지구(輝山風景區) 안에 있는 기반산(棋盤山) 풍경구 내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은 1987년 문화재 재조사 때 심양시 문물조사대에 의해 발견됐으며, 1990년 이래 여러 차례 발굴을 통해 철기, 토기, 쇠화살촉, 갑옷편 등의 유물과 함께 건물터와 부엌 등 주거 유적이 발견됐다.

성벽의 총 둘레는 1천375m로 그리 길지 않지만, 치(雉·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에서 튀어나오게 쌓은 시설)가 10개나 되는 보기 드문 산성이다.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치가 가장 많이 설치됐으며, 성의 수구(水口)도 발견되는 등 고구려성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석대자산성은 산의 자연적인 형세를 이용해 쌓았다. 산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산성 동쪽과 남쪽은 포하(蒲河)계곡과 닿아 있다.

산성 바깥쪽 서·북쪽은 모두 계곡이고, 서북 봉우리와 북쪽의 대양십산(大洋什山)은 산등성이가 서로 이어져 있다. 대양십산은 병풍을 두른 듯 산성 서북쪽에 우뚝 서 있다.

서쪽 계곡은 제법 넓고 깊어 구도구(九道溝)라고 부르고, 북쪽 계곡은 좁고 얕아 십도구(十道溝)라고 부른다. 구도구와 십도구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은 주변 산들이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는 형태다.

산성은 자연지세를 활용해 성벽을 쌓았으며 골짜기 입구나 낮고 오목한 곳에는 문과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산세가 완만하고 요긴한 목에는 치를 쌓고, 성안의 평평하고 완만한 남북 대지에는 주거지와 창고를 세웠으며, 성안 남쪽 봉우리 가장 높은 곳에는 망대를 설치하는 등 완벽한 주거와 방위를 구성하고 있다.

산성의 성벽은 전부 돌로 되어 있고, 성벽 안팎을 1m에 0.05∼0.08m씩 들여쌓았다. 외벽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6∼7m이고 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동문 북쪽에 있는 한 단으로 약 11m 안팎이다.

성벽의 높이는 1.5∼2m 정도로 계속 이어지다가 60여 m 간격으로 10개의 치성이 설치돼 있다.

치성의 특징은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대부분 9∼10m로 바른네모꼴에 가깝고 문 옆에 쌓아 옹성과 같이 사용했다. 북문 왼쪽에 있는 치성은 문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홀승골성(오녀산성)이나 환도산성에서 ㄱ자나 ㄷ자로 쌓은 성문과 같은 성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북문 양쪽에는 특이한 지도릿돌(樞石)이 두 개 남아있다. 지도릿돌에는 두 개의 네모난 구멍이 파져 있는데 하나는 문기둥을 세웠던 곳이고, 나머지 하나는 문을 다는 지도리(돌쩌귀)를 박은 곳이다.

석대자산성에서 나온 지도릿돌은 네모난 구멍의 깊이가 얕고 닳은 흔적이 전혀 없으며 주변에 쇠의 녹이 붉게 물들어 있다. 이 얕은 구멍에다 쇠로 만든 지도리를 설치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1천500년 전 고구려인들의 우수한 철기 사용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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