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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2. 故 이병희 前 국회의원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을 얘기하면 가장 앞자리에 오는 사람.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 늘 사람들에게서 그와 같은 정치인 한사람만 더 있으면 하는 시민들의 이구동성을 듣는 사람.

가장 먼저 화성의 진가를 알아보고 복원에 나서 세계문화유산의 초석을 놓았던 사람. 경기도청과 삼성전자의 유치로 지금의 수원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

수원과 수원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된 일 하나 하지 못한채 지금같은 선거때면 표심을 노린 ‘수원의 아들’과 ‘경기도의 아들’이 넘쳐 날수록 그 자리가 더 커보이는 사람이 바로 이병희 전 국회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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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경기도청은 반드시 수원으로 와야 합니다. 경기도가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청 소재지는 인천이 아닌 경기도 중심에 있는 수원이 돼야 합니다”

5.16 이후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본격 시작된 1963년. 삭발까지 감행하고 당대의 권력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무릎을 끓고 소신있게 청원한 당시 경기도청 수원유치위원회 이병희 위원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이병희 위원장이 국회의원 당선증을 받아들자마자 사직서까지 품고 올라가 청원한 1963년 11월 26일은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는 날이었다. 마침내 밤 8시경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던 이주일 소장은 “경기도청 소재지는 수원으로 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1953년 이후 10년을 끌어온 경기도청 유치를 둘러싼 수원과 인천의 치열한 유치전이 수원을 환호의 물결로 뒤덮으며 그렇게 막을 내렸다.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인 이병희 전 국회의원 하면 가장 먼저 회자되는 경기도청 수원 유치는 바로 그렇게 이뤄졌다.

1926년 용인에서 태어나 5.16 군사혁명에 참여한 이후 38세의 젊은 나이에 수원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하던 그는 수원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수원과 수원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첫번째 과제에 과감히 나서 경기도청 수원 유치를 확정했다. 1964년 10월 15일 수원시 고등동 팔달산 밑 수원공설운동장터에서 15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개최된 경기도청사 신축기공식을 시작으로 수원의 역사는 바뀌기 시작했다.

라이벌 도시 인천이 분루를 삼키는 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수원이 성큼성큼 커갈 무렵 이병희가 또 한번 사고를 친다.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호암자전’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이병희 국회의원의 끈질긴 설득이 계속됐다. 이병철 회장이 부정축재자로 내몰렸던 5.16 직후 박정희 대통령과 이 회장의 면담을 주선했던 인연을 바탕으로 삼성전자 수원공장 유치전에 나섰던 것.

 

 


이 전 의원은 이병철 회장에게 삼성전자 수원 유치를 확정하고 동생인 이병성 용인상공회의소 회장과 함께 직접 발품을 팔며 땅을 찾아 다녔고, 결국 지금의 수원사업장이 들어선 수원시 매탄동 일대를 찾아냈다. 그후 1971년 11월 수원공장 건설공사를 시작으로 삼성전자는 바로 여기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수원 경제 살리기에 대한 이 전 의원의 노력은 계속됐다. 선경합섬 수원공장과 한일합섬 유치, 한국담배인삼공사 수원제조창 등 크고 작은 수많은 기업들을 수원으로 유치했다. 전형적인 농업도시였던 수원은 경기도청 이전과 삼성전자, 선경합섬 등의 유치로 사람이 밀려들고 활력이 넘쳐나는 도시로 탈바꿈했다. 이 전 의원은 38세에 수원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7선을 했다. 무임소장관을 지낸 바도 있다.“수원에서는 이병희를 통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 전 의원은 한창 잘나가던 6~10대 의원을 거치면서 수원사람 7천여명의 취업을 알선했고, 5천건이 넘는 주례를 섰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고, 그만큼 수원 사람들을 소중히 여겼다.

수원 화성 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수원 화성을 복원해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국고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십시오”라는 이 전 의원의 건의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부터 5년간 당시 돈으로 32억5천만원의 국고를 지원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으로 파손·소실된 화성을 복원했다.

그 후 이 전 의원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오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11, 12대 국회는 발이 묶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자리가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원의 비극이 연달아 이어진다.

정권의 합법성과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신군부가 뽑아든 비장의 무기는 바로 ‘소지역주의’였다. 1981년 7월 1일 경기도의 중심도시로 수원과 자웅을 겨루며 동반 성장하던 인천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원시와 화성군, 용인군 일부를 중심으로 수원광역시 승격 바람이 일었으나 좌절됐다. 이어 1989년 화성군에서 오산시가 승격되고, 지방자치제의 부활과 함께 소지역주의가 고착화되면서 수원권 복원 노력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수원의 아픔을 지켜보던 이 전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다시 국회의원 뺏지를 달았지만 이듬해인 1997년 1월 13일 위암으로 세상을 뜬다. 그리고 다시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도시발전의 씨앗을 뿌린 수원은 110만의 전국 최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광역시에 버금가게 성장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수원사람을 자처하고 그가 달았던 국회의원 뺏지를 달고 여의도로 갔지만 ‘이병희같은 정치인 하나만’이라는 수원사람들의 탄식은 계속되고 있다.

수원의 역사를 바꿔 놓은 ‘수원사람’ 이병희. 수원권 복원과 4.11 총선을 앞둔 지금 그에 대한 평가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