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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황진이를 만나다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1. Prologue

 

"안 돼! 우리 애들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거야!"

 

길을 막아선 데모대 앞쪽으로부터 여성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차의 다섯 칸쯤 앞에 있던 승합차 운전자가 클랙슨을 신경질적으로 서너 번 울리면서 운전석 차창 밖으로 투실투실한 주먹을 내밀어 팔뚝질을 해대더니 이내 포기했는지 잠잠해졌다. 길은 금세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와! 저년 봐라! 홀딱 벗었네? 완전히 미친년 아냐? 개새끼들하고만 살더니 아주 개가 돼버린 모양이네! 물러가라, 이 개 같은 년아!”

 

데모대 안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듯 욕설을 퍼대는 사이에 킥킥거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냄새나서 못 살겠다, 똥개들을 몰아내자’ ‘주택가 한복판에 개 농장이 웬 말이냐?’ 이면으로 보이는 플래카드 글씨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핸들을 꺾어 오른쪽 나지막한 보도블록 위로 개구리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데모대는 어림하여 이백여 명쯤으로 헤아려졌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두 명의 정복 경찰관들이 보였다. 여성들이 대다수인 사람들을 우회하는 동안 앞쪽에서 여러 마리의 개들이 왈왈 짖어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어수선한 군중 앞쪽에는 뜻밖에도 꽃무늬 비키니 차림의 한 중년 여인이 낡은 슬라브가옥 대문 앞에서 시위대에 맞서 버티고 선 채 악을 쓰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놀랍게도 시퍼렇게 날이 선 식도가 들려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열린 대문 안에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여러 마리의 다양한 종류의 개들이 보였다. 그중 일부는 불안에 찌든 소리로 대문 밖 군중들을 향해 왈왈, 멍멍 중구난방 짖어대고 있었다.

 

비키니 차림의 벌거벗은 여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몸매가 남다르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몇 발짝 더 다가간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 여자가 왜 여기에? 황진이(黃眞伊)였다. 한때 연극무대와 은막, 티브이 공간에서 이름을 날리던 스타 여배우 황진이가 틀림없었다. 온몸의 땀구멍이 일시에 열린 듯 뜨거워졌다.

*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빨간 머그컵에다가 커피를 타와 내 앞에 놓은 그녀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깊게 파인 연분홍색 스웨터 차림인 그녀의 알맞게 크고 예쁜 눈을 들여다보면서 더욱 확신했다. 조금 흐릿해진 눈빛이었지만 그녀가 분명했다. 이십여 년 전 즈음에 동숭동 극장가에서 처음 만났던 열아홉 살의 예쁜 여배우 그녀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나를 떠올려주기를 기다리면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기억의 샘 속으로 부지런히 두레박을 던지는 듯 머리를 살짝 흔들고, 눈을 여러 차례 깜박이면서 생각에 골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고개를 푹 떨어뜨리더니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잘 모르겠어요. 기자님이셨고 지금은 소설가님이라고 하셨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낯선 분이세요. 제 기억에 있지 않아요.”

 

데모대 앞에서 식칼을 들고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경찰의 설득으로 칼을 내려놓고 옷을 챙겨 입었다. 데모대는 달려온 시청 간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뒤에야 플래카드를 접었다. 수년 전부터 유기견들을 모아서 기르고 있는 그녀의 집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수시로 민원을 제기해왔다고 했다. 개 짖는 소리에 잠을 못 자고 냄새가 나서 살 수 없다는 항의가 끊이지 않았고, 시시때때로 옥신각신하던 중에 극한충돌이 빚어진 모양이었다. 머리를 식힐 겸 용문사로 가던 나는 계획을 포기하고 시위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황진이라는 것을 안 이상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기억 속 내 존재를 일깨우는 일을 포기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동숭동 극장가에서 그녀를 처음 인터뷰한 이후 미모의 잔상 때문에 며칠이고 잠을 못 이루던 내 젊은 날의 기억을 살려낸 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이렇게 소설가님께서 저를 잘 안다고 하시니 고맙네요. 유기견 문제의 심각성을 제발 세상에 알려주세요. 이런 생명경시 현상은 필경 인류사회의 재앙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분노를 넘어선 쓸쓸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이 얇게 그린 눈썹 말고는 옛날 청초하고 아름답던, 갸름하고 작은 얼굴 턱선이 그대로였다.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풍만한 그녀의 가슴 또한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나는 머그컵을 들어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건 그렇고, 시청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일주일 이내에 아이들을 모두 처리하라 하고 갔어요.”

 

“모두 몇 마리나 되나요?”

 

“정확하진 않지만, 백 마리는 넘을 거예요.”

 

“대안이 있으신가요?”

 

“마땅한 방법이 없어요. 유기견 보호소로 가면 거의 모든 아이가 안락사 처리되고 말아요. 지키는 데까지 지켜야지요. 제가 버티면 얘들이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으니까요.”

 

연예계에서 누구보다도 화려하던 이 여자가 왜 이 꼴이 되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물어보아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묵묵하게 앉아 있는데, 황진이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러고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서너 마리 개들이 그녀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다녔다. 개털에서 나는 특유의 노린내가 새삼 코를 찔렀다. 한동안 서랍장을 뒤지던 그녀가 가지각색의 노트들을 한 아름 가득 안고 다시 나타났다. 스무 권도 훨씬 더 돼 보였다. 낡거나 색이 바랜 것들이 많았다.

 

“뭔가요?”

 

“제가 살아오는 동안 틈틈이 써온 기록이에요. 제 삶의 흔적들인 셈이지요.”

 

“일기장?”

 

“이십여 년 꾸준히 쓴 거니까, 일기장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걸 왜?”

 

“이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이고 버리려고 하던 물건이에요. 소설가시라니까, 드릴게요. 워낙 거칠게 살아온 날들의 시시한 이야기들이라, 별 가치는 없겠지만 작가님께 조금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아무래도 이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고…왠지 그러고 싶어지네요. 불태워버리는 것보다는 좀 나을 듯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때 저만큼 건넛방에서 커다란 수캐 한 마리가 제 몸피의 반나마 될 듯한 작은 암캐의 등을 타고서 식식거리는 소리를 내며 짝짓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자꾸만 눈길이 갔다. 슬금슬금 개들의 짝짓기에 눈길을 보내는 나를 의식한 황진이가 슬며시 일어나더니 거실 쪽으로 난 건넛방 문을 닫았다. 살짝 당황한 듯한 그녀의 얼굴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또 한 번 그녀가 여전히 참 예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진이의 일기장은 모두 스물여섯 권이나 됐다. 일기장 기록들은 흥미진진했다. 예쁜 여배우의 삶 뒤안길에서 일어난 파란만장한 일들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그 주말에 나는 늙은 여배우 황진이로부터 넘겨받은 일기장을 읽느라고 밤을 꼬박 새웠다. 한때 기자였던, 작가로서의 충동이 소용돌이쳤다.

 

장편 소설을 쓰기로 했다. 본명 김윤희. 그녀가 작은 몸으로 겪어낸 세상 이야기들을 모두 쏟아내어 직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작품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온 세상 이면에 대한 아주 특별한 탐험기가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해온 진실들이 마구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 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더 많다는 진실을 독자들이 조금은 더 알게 되길 바라면서 써나가고 싶다.

 

그러나 어쨌든, 이 글은 소설이다.

 

▶ 어린 시절 김윤희는 어떤 아이였을까요? 여고생 김윤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녀는 어떤 운명을 안고 태어났을까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다음 주 금요일 후편 ‘(0002)예쁜 아이-①카페 아프리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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