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월이 오면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물결치고, 107년 전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을 기리는 행사들이 열린다. 우리 포천 지역도 호국보훈의 고장답게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그 뜻을 새긴다, 하지만 화려한 기념식 조명이 꺼진 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차가운 현실은 바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겪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빈곤이다. 많은 이들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면 국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을 거라 짐작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가보훈부의 보상금은 선순위 유족 1인에게만 지급되는 구조로서,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나머지 자녀와 손자녀들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명예만 간직한 채, 경제적 고통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떄문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영웅들의 헌신이 남겨진 후손들에게 평생 가난의 굴레가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2026년 오늘의 우리 사회가 과연 이 말 앞에 당당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최근 일부 지자체에선 이러한 보훈의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 의미 있는 변화를 시작했다. 저소득층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지자체 차원의 생활지원수당을 지급
[ 경기신문 = 황기홍 화백 ]
지난 2월 25일, 전국 법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회가 개정을 추진하는 ‘사법개혁 3법’에 대해 집단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법원장 회의의 모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특권의식이 그 배경이고, 작금의 사법 불신을 자초한 과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결여된 적반하장식 행보로 비춰질 뿐이다. 사법부가 ‘독립’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과연 우리 법원이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 부합하는 정의를 실현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해 대선국면에서 보여준 대법원의 대선 개입 논란은 사법부의 독립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특히 국민적 공분을 샀던 ‘윤석열 내란수괴 구속취소’와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들은 사법부가 법리가 아닌 정치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껏 심판해야 할 법관들이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특정 진영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해온 것은 아닌지 뼈저린 성찰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번 법원장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살펴보면 실망감은 더욱 커진다. 이들은 사법개혁 3법이 법관의…
한국 현대시의 큰 나무인 최동호 선생이 지난달 20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한국문학의 미래에 관한 뜻깊은 강연을 했다. 주제는 ‘디지털 전환기 한국 현대시의 지향점과 시노래의 문화적 가치’였다. 이 강연은 MIT의 인간통찰 협력연구 프로그램인 MITIC(MIT Human Insight Collaborative)가 주관하는, ‘마스터 클래스 시리즈’의 초빙 강사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선생은 여기서 해당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견해를 제시했고, 현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한국문학이 주요한 세계 무대에서 그 의의와 보람을 증명한 ‘사건’이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주제론적 접근이었고, 한국문학으로서는 새 강역(疆域)의 개척이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안방에 앉아 구두선(口頭禪)으로 내놓는 주장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그 현장을 찾아가며, 활달한 소통으로 현지 문화예술인들의 공명(共鳴)을 자아내는 기량과 노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문학계나 문화정책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구체적 사례를 부양(浮揚)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선생은 미국
100세 시대, 퇴직 후 시간은 역할을 상실한 잔여 인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다. 나는 주위의 다양한 삶을 통해 중노년기 삶은 얼마를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삶의 주요 요소들에 대한 비움과 재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노년기에 있어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인 것 같다. 젊은 시절, 건강이 ‘성취’라면, 이때의 건강은 ‘협상’이다. 신체는 더 이상 무한히 복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리한 도전보다 지속 가능한 리듬이 중요하다. 규칙적인 수면, 균형 잡힌 식사, 적정한 운동은 삶의 독립성을 지키는 최소 조건이다. 특히 근력과 정신건강의 유지는 단순한 체력이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타인의 도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신체적 자율성은 곧 심리적 자율성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또한 관계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는 양보다 질이 중요해진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소진을 야기한다. 상호 존중과 정서적 안정을 주는 밀도 있는 관계에 집중하고, 의무감만 존재하는 관계는 정중히 거리를 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우자와의 관계 역시 ‘역할’ 중심에서 ‘동반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녀가 독립한 이후, 부부는 다시
경기도 내 학교에서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학생맞춤형통합지원(학맞통)’을 놓고 부실 운영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제도를 담당할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내 약 2526개 학교 가운데 학맞통 업무를 담당할 교육복지사가 배치된 곳은 고작 151곳으로서 전체의 6%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인력으로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력공급 확대를 비롯한 제대로 된 지원체제가 시급하다. 지난해 1월 21일 제정돼 오는 3월 1일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인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모든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전인적 인재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다. 학업 부진, 정서 문제, 학교폭력, 빈곤, 가족 갈등, 또래 관계 어려움 등 복합적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을 학교가 직접 발굴해 지원하는 제도인 셈이다. 학맞통은 학생에 대한 ‘통합 진단’을 바탕으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되며,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복합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에도 학생 지원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이 운영되어 왔으나 각 사업이 분절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원의 중복, 사각지대…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을 지나고 청파동입구교차로에서 경부선 철도 밑의 쌍굴다리 2차선 도로를 건너 남북 방향 6차선의 청파로를 만난다. 너푸내란 하천과 옛길을 함께 복개하여 만든 도로다. 옛 문헌과 지도에는 한자 蔓(넝쿨 만), 草(풀 초), 川(내 천)의 뜻을 따서 蔓草川(만초천)으로 표기했다.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인왕산의 서남쪽과 안산의 동남쪽 골짜기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흐르다가 원효대교 부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6차선의 청파로 건너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빌딩 앞에 청파배다리의 표지석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청파배다리 터(靑坡舟橋址) :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蔓草川, 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에 놓였던 돌다리인 청파배다리가 있던 곳이다. 원래는 북쪽으로 300여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 이 지역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남대문 정거장, 즉 지금의 서울역이 1900년 7월 8일에 생기면서 옛길과 너푸내의 유로가 꽤 변했다. 너푸내를 건너던 청파배다리의 위치가 북쪽 300여 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는 문구가 그래서 기록됐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1:5만 지형도에는 쌍굴다리 길로 경부선 철길 밑을 지나 청파
언어 수행 차원에서 인격 발달의 성숙을 보이는 인간을 말하라면, ‘듣는 인간’이 여기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듣는 인간’에게서 ‘긍정의 철학’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 긍정성은 개인의 성숙에 그치지 않는다. 긍정의 지향이 관계들의 선순환과 소통을 대화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돋보인다. 일상 현실 속 사람들의 구체적 언어 수행에서 인간적 성숙을 감득하게 하는 장면도 ‘말하는 인간’보다는 ‘듣는 인간’에게서 경험할 때가 많다. ‘듣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실천적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말하기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듣기의 현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듣는 인간’은 ‘잘 듣는(들으려는) 인간’이다. ‘잘 듣는 인간’에서 ‘잘’은 기능적 숙련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의 뛰어남과 정의(情意 Affective)의 원만 풍성함과 윤리의 아름다움을 모두 실천해 내는 수준을 뜻한다. ‘잘 듣는 인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의 자질을 자신의 듣는 역량 수준으로 고르게 녹여 넣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듣는다’의 함의는 참으로 깊고 두텁다. 논어의 이인(里仁)편에는 ‘조문도…
[ 경기신문 = 황기홍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