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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말하다]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④

일본 참모본부가 만든 ‘임나 가야설’

 

서기전 28년에 임나가 있었다는 ‘일본서기’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가야와 임나는 동일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물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처음 만든 논리다. 그런데 ‘임나=가야설’은 민간인 식민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본 참모본부(參謀本部)가 조직적으로 퍼뜨린 논리이기도 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6년 후인 1882년에 육군참모본부는 ‘임나고고(任那稿考)’ 및 ‘임나명고(任那名考)’라는 임나 관련 저서를 간행했다. 가야가 임나이자 야마토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책들이다. 임나(任那)는 일본어로 미마나(みまな)라고 한다.

미마나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반 노부토모(伴信友:1773~1846) 등의 일본 극우파 학자들은 미마나가 ‘일본서기’상의 10대 임금인 숭신(崇神:재위 서기전 97~서기전 30)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반 노부토모는 일본을 대황국(大皇國), 즉 ‘위대한 천황의 나라’라고 주장했던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8) 일본 국학자다. 일제가 스스로를 황국(皇國), 자국 군대를 황군(皇軍)이라고 부르는 논리를 제공한 인물이다.

‘일본서기’나 ‘고사기’,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 등에는 숭신의 이름이 일곱 개나 나타난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어간성(御間城)인데, 그 일본어 발음이 미마키(みまき)다. 어진목(御眞木)도 숭신의 이름인데, 이 역시 발음은 미마키다. 숭신은 미만귀(美萬貴)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 역시 발음은 미마키다. 이 미마키에서 미나나(임나)가 나왔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상 11대 임금이라는 수인(垂仁) 2년(서기전 28) 조에 이런 기사가 있다.

 

“이해에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귀국하고 싶다’고 청했다. 아마도 선왕 때에 내조(來朝)하러 왔다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인가?”

 

이 기사가 나오는 수인 2년은 서기전 28년인데, 가야는 그보다 70년 후인 서기 42년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임나는 가야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이 기사는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선왕, 즉 숭신 때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상 10대 임금인 숭신은 서기전 97년부터 서기전 3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가야가 건국되기 150여 년 전에 즉위해 가야가 건국되기 7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가야가 임나라면 숭신 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야 사람이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갔다는 말인가? 게다가 숭신이고 수인이고 서기전 1세기 때 일본열도에는 이런 임금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야마토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가지고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면 뒤죽박죽이 되어 길을 잃기 일쑤다. 가야가 건국되기 70년 전에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그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야마토왜에 조공 바치러 갔다는 것이 ‘일본서기’ 기사인데, 일본인도 아닌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가야는 임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니 세계 사학사상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서기전 27년에 가야가 신라와 싸웠다는 ‘일본서기’

 

그런데 위 소나갈질지 기록 바로 뒤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어간성(御間城:숭신) 천황 때 아라사등(阿羅斯等)이라는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가 야마토왜에 왔다는 것이다. 숭신이 죽은 후 3년 동안 그 후사인 수인을 섬기면서 야마토왜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원문을 직접 보자.

 

“천황이 (가라왕자) 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아라사등이 “크게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천황이 아라사등에게 조(詔)를 내려서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숭신)도 만나 뵙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본국명을 고치되 어간성(숭신) 천황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으로 고치라”고 했다. 이에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로 돌아가게 했다.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彌摩那國:임나국)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아라사등은 지급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나라의 군부(郡府)에 간수했다. 신라인이 이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아 갔다.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일본서기’ 〈수인 기〉)”

 

이 기사는 의부가라 왕자 아라사등이 숭신을 섬기기 위해서 왜에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숭신을 만나지 못하고, 그 후임인 수인을 만나 3년간 섬기다가 귀국했다는 기사다. 이때 수인이 숭신의 이름인 어간성(미마키)를 따서 나라 이름을 미나나로 고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수인이 미마나에 붉은 비단을 내려줬는데, 신라가 이를 빼앗아 가면서 신라와 임나 사이에 원한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수인 3년은 서기전 27년으로 가야가 건국되기 69년 전이다. 이때 생기지도 않았던 가야가 역시 있지도 않았던 야마토왜에서 내려 준 붉은 비단 때문에 신라와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니 이 역시 허황된 기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다?

 

일본인 학자들은 허황된데다 연도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를 가짜로 모는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한 강단사학계는 ‘‘삼국사기’ 불신론’을 하나뿐인 정설로 높인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 평생 이 분야를 연구했던 고 최재석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조작에 방해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조작으로 몰고, 가야와 미나나(임나)가 전혀 별개의 나라라는 증거는 있을지언정 같은 나라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음에도 가야와 미나나가 동일국이라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일본인들의 주장에 어찌하여 한국의 사학자들도 무조건 동조하며 가야와 미나나가 동일국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최재석, ‘일본서기의 사실기사와 왜곡기사’)”

 

가야가 건국되기 70여 년 전인 서기전 28년에 ‘일본서기’에는 임나라는 이름이 등장하므로 가야는 임나일 수 없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임나=가야설’은 서기 42년에 태어난 가야라는 갓난아이의 나이가 이미 일흔 살이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이런 뻔한 사실들은 모른 체 하면서 “우리 학자들이 모두 한 통속인데, 누가 이를 알아차리겠는가?”라면서 ‘가야는 임나’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최재석 교수는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삼국사기’ 불신론’을 신봉하는 것도 이렇게 비판했다.

 

“이러한 경향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조작설에 대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인들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경우에도 한국 고대 사학자들은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 채 ‘삼국사기’가 조작되었다는 부분에만 관심을 보여 ‘삼국사기’가 조작되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최재석, ‘일본서기의 사실기사와 왜곡기사’)”

 

고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동전의 양면이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한 것은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이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참모본부

 

일본 참모본부는 1880년에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사코 카게아키라고도 읽음)를 간첩으로 북경에 보내 중의학(中醫學)을 공부하면서 중국어를 익히게 했다. 사코는 1883년 4월부터 7월까지 지금의 길림성 집안(集安)현에 머물며 ‘광개토대왕비문’의 탁본을 떴고, 이듬해 이를 일본으로 가져갔다. 육군참모본부는 이 탁본의 존재를 비밀에 붙인 채 여러 한학자들을 동원해 비문을 해독하고 왜곡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비문에 왜(倭)가 나오는 점에 착안해 이 왜가 야마토왜라고 우기면서 신라, 백제, 가야 등을 식민지로 지배했다고 조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총론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라고 자화자찬한 후 본론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가야는 임나다’라고 주장한다.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1894년의 청일전쟁 결과 맺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하관조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는데, 그 1항이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가 갖고 있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일본이 갖겠다는 뜻이다. 2항이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 및 팽호도(澎湖島) 등을 일본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요동반도·대만·팽호도를 차지하는 것보다 한국에 대한 종주권 확보가 더 중요했다는 뜻이다. 일본 참모본부가 어떤 정신자세로 1882년 ‘임나고고’ 및 ‘임나명고’를 냈는지 짐작하게 해 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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