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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일제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은 황국사관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⑥

 

 

 

◇ 일제 패전 후에도 살아남은 황국사관

 

 

일제 식민사학은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도(裕仁)의 무조건 항복선언과 함께 관 속에 들어갈 운명이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나치 역사관이 종언을 고한 것과 같은 운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치 붕괴 이후 나치 역사관은 유럽에서 종언을 고했으나 일제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일제 패망 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1939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삼국동맹을 맺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제 식민사관과 나치 역사관은 쌍둥이였다. 나치의 인종 차별주의 정책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치는 게르만족이 속한 아리안인은 외형으로 봐도 우수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켈트족, 앵글로 색슨족, 슬라브족 할 것 없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아리안족 계통이고, 중동의 이란도 아리안족 계통인 것처럼 선천적 인종 우월주의는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치가 인종 우월주의 이론에 기대어 유태인 말살정책을 자행한 것처럼 일제도 극심한 민족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일제는 일본인들은 1등국민으로 높이고, 조선인과 유구인(琉球人:오키나와인)은 2등국민, 대만인은 3등국민으로 나누어 차별대우했다. 가야계와 백제계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 최초의 정치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은 자기역사의 부정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 패전 후 일본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반성의 기운이 일었다. 일본의 역사학이 제국주의 침략의 이론으로 악용되었다는 반성의 기운이었다. 전후 일본 역사학계가 이런 분위기를 이어갔으면 일본은 지금쯤 아시아 여러 국가, 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화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성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두 역사학자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였다.

 

◇ 패전 후 천황제를 옹호한 쓰다 소키치

 

 

쓰다 소키치는 원래 『일본서기』에 나오는 초대 신무(神武)부터 14대 중애(仲哀)까지는 신화상의 인물, 즉 존재하지 않았던 일왕들이고 15대 응신(應神)부터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했었다. 또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도 실존했던 인물인지 비판적으로 고찰했었다. 메이지 헌법에 일 왕가는 신성불가침이라고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9년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1894~1946) 등의 황국사관론자들은 쓰다가 초기 일왕들의 실존성을 부정했다고 공격했고, 일본 정부는 1940년 쓰다 소키치가 쓴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研究)』, 『신대사의 연구(神代史の研究)』, 『일본상대사연구(日本上代史研究)』, 『상대 일본의 사회 및 사상(上代日本の社会及思想)』 등 4권의 저서를 출간금지시켰다. 이 사건으로 쓰다는 1940년 와세다대를 사직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1942년 금고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는데, 군국주의 치하에서 황실모독죄로 기소되었다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것은 무죄판결과 진배없었다. 이 사건은 쓰다 소키치가 마치 황국사관을 부정하는 학자인 것처럼 인식되어 그의 성가(聲價)를 높였다.

 

일제 패전 후 그의 역사관은 ‘쓰다사관(津田史觀)’으로 불리면서 ‘황국사관’과 맞서는 것처럼 포장되었다. 그러나 쓰다는 1946년 잡지 『세계(世界)』 4호에 「건국의 사정과 만세일계의 사상」이란 논문을 실어서 “천황제는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며, 민주주의와 천황제의 모순은 없다”라고 주장해서 스스로 ‘쓰다사관’을 버리고 황국사관론자임을 천명했고, 그를 믿던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천황제 폐지론자들은 쓰다가 ‘전쟁 전의 사상에서 변절했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전쟁 때도 천황제를 부인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일본서기』는 조금만 들여다보면 1대부터 14대 일왕까지는 실제 존재했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썼다가 기소되었을 뿐이었다.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마음먹고 거짓으로 쓴 역사서이기에 허구의 일왕들이 수두룩한 것이 당연한데, 문제는 쓰다 소키치가 이런 잣대를 『삼국사기』에도 들이댄 것이었다. 쓰다는 『일본서기』의 초대부터 14대까지 허구의 인물인 것처럼 『삼국사기』도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이 건국했고, 신라는 19대 눌지왕(재위 417~458) 고구려는 6대 태조왕(재위 53~146)이 건국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서기』가 가짜니 『삼국사기』도 가짜라는 논리였다. 『일본서기』는 서기전 660년에 야마토왜가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야마토왜의 역사를 1천년 가까이 조작한 것이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삼국사기』를 가짜로 몬 것은 내가 사기꾼이니 너도 사기꾼이라는 논리에 다름 아니었다.

 

◇신라는 법흥왕 때 건국되었다는 스에마쓰 야스카즈

 

쓰다 소키치에 이어 일본 학자들의 반성 기운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이 한국 강단사학자들이 지금도 존경해 마지않는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1904~1992)였다. 최근 세상을 떠난 김용섭 교수의 자서전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에는 서울대 교수 시절 스에마쓰와 관련한 일화가 실려 있다.

 

「다른 한번은, 분명치는 않으나, 민족주의 역사학인가, 실증주의 역사학인가에 관하여 검토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교학부장 고윤석 교수도 포함된 네댓 명의 중년·노년의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768쪽)」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간사이자 경성대학교 교수 출신의 식민사학자 스에마쓰가 광복 후에도 국내를 들락거리면서 사학과 교수들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다. 스에마쓰는 일제 패망 후에 일본의 왕족·귀족들을 교육시키던 학습원대학의 교수가 되어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를 출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은 한 마디로 “대일본제국은 다시 한국을 점령할 것이니 제국의 신민들이여 낙심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스에마쓰는 이 책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 깡패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야마토왜의 식민지인 임나(가야)가 경상남북도는 물론 충청과 전라도까지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 패전 후에도 한국을 들락거리면서 사학과 교수들을 지도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대학생 이진희가 수업 청강을 부탁하자 거절했던 인물이었다(재일사학자 이진희가 만난 스에마쓰 야스카즈: 2020.08.03.)

일본인들의 『삼국사기』 불신론은 한마디로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스에마쓰가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삼국사기』에 있는 신라시조의 즉위 개국년인 B.C. 57년(오봉 원년 갑자)부터 514년(23대 법흥왕 즉위년)까지는 571년간이 되지만 내외의 증거사료에 의하여 신라가 한 국가로서 역사상으로 활동한 때를 추구하면 나머지 150년이 개국기가 된다”(「조선사(朝鮮史)」, 1938)“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나머지 150년’이란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 23대 법흥왕(재위 514~540)이 즉위년까지를 뜻한다. 즉 17대 내물왕까지는 완전한 조작이고, 내물왕 때부터 23대 법흥왕 때까지 150년이 개국기라는 것인데, 이 시기도 반은 전설이고, 반은 역사라는 것이다. 그는 ‘내외의 증거사료에 의하여’라고 말했지만 물론 ‘내외의 증거사료’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사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에마쓰는 결국 신라는 법흥왕 때 건국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허황된 논리가 아직도 통하는 두 동네가 일본 극우파 역사학계와 남한 강단사학계다. 일본인들은 어쨌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다 치더라도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사를 왜곡하는지 세계 사학사상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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