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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소승불교가 먼저 들어왔다는 최치원

가야불교 이야기③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우리 국민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구려 소수림왕이 재위 2년(372)에 이땅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고 배운다. 진(秦:전진)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백제에는 침류왕 재위 원년(384) 불교가 들어왔다고 배운다. 진(晉:동진)나라에서 온 인도출신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삼국사기》 기록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불교는 대승불교다. 고구려 소수림왕이 재위 5년(375) 초문사를 세워 승려 순도를 두고, 이불란사를 세워 승려 아도를 둔 것에 대해 김부식은 “해동불법의 시작이었다”라고 설명했지만 이는 “대승불법의 시작이었다.”

 

불교는 크게 대승(大乘)불교와 소승(小乘)불교로 나누는데 그 갈라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불교사를 대략 살펴봐야 한다. 석가모니가 재세(在世)했던 서기전 6~서기전 5세기의 불교를 근본불교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후 갠지스강 유역으로 교단을 넓히면서 《아함경(阿含經)》 등의 원시경전이 성립된 시기를 원시불교라고 한다. 원시불교는 대략 석가시대부터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룬 아소카왕(阿育王:재위 서기전 272?∼서기전 232?) 시대까지의 불교를 뜻한다. 그 다음 아소카왕이 불교에 귀의하면서 불교 교단은 급속하게 발전하는 동시에 교단이 분열되는데 이를 부파(部派)불교라고 한다. 그 후 서기전 2세기~서기전 1세기 경 대승불교가 나타난다.

 

그런데 소승불교라는 이름은 대승불교에서 붙인 것이었다. 대승불교는 자신들을 큰(maha) 수레(yana)인 대승(大乘)이라고 부르면서 기존의 불교를 작은(hīna) 수레(yana)인 소승(小乘)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소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시한다.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의 성불(成佛) 가능성을 인정하여 일체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모두가 구원을 받는 사회구원을 중시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대승불교의 경전이 《반야경(般若經)》이었다.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구려, 백제, 신라에 전파되었다가 다시 백제를 통해 왜에 전파되었다. 소승불교는 인도에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지로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전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소승불교의 전래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소승불교의 전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소승불교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파사왕이란 불교식 왕호

 

신라 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재위 80~112년)은 글자 그대로 ‘승려이사금(왕)’, 또는 ‘스님이사금’이라는 뜻이다. 신라 5대 임금이 불교식 왕호를 가진 것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우연히 불교식 왕호를 채택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왕호란 그 임금의 정체성을 가장 잘 말해주는 용어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에는 해발 235m의 파사산이 있고, 그 산에는 파사성(婆娑城)이 있다. 신라의 파사이사금 때 쌓아서 파사성이라고도 하고, 고대 파사국(婆娑國) 옛터가 있어서 파사성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비록 문헌사료가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이지만 이런 전설이 지금껏 전해지는 것도 어떤 근거가 있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지증대사탑비의 내용

 

 

이 땅의 불교전래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경북 문경시 가은면(加恩面) 원북리(院北里) 봉암사(鳳巖寺)에 있는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보물 138호)〉다. 이 비에는 《삼국사기》의 불교전래 기록과는 자못 다른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저자가 다름 아닌 신라 최고의 지식인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기 때문이다. 이 탑비는 신라 경애왕 원년(924년)에 세운 것인데,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이다. 지증대사는 속성이 김씨로써 헌덕왕 16년(824)에 태어나 17세에 부석사에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 그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을 계승해서 봉암사를 세웠는데, 헌강왕 8년(882)에 59세 때 법랍 42세로 입적하자 나라에서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지증대사탑비〉는 지증대사의 행적과 함께 신라가 불법의 힘으로 백제·고구려를 꺾고 삼국을 통일시켜 “한 집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것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살피고, 고을을 가지고 고을을 살펴보면 불교의 바람이 사막과 험준한 고개를 넘어서 지나서 오고, 그 파도가 바다 모퉁이에 미치기 시작했다[就以國觀國考從鄕至鄕, 則風傳沙嶮而來 波及海隅之始]”

 

이 문장의 ‘바다 모퉁이[海隅:해우’]란 이 탑비를 판독한 불교학자 남동신(南東信)이 주석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라를 뜻하기도 하고 이땅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이 문장은 불교가 두 길로 이 땅에 전해졌다고 말해주고 있다. 하나는 사막과 산맥을 거쳐서 온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를 거쳐 온 불교다. 사막과 산맥을 거쳐 신라에 온 불교가 대승불교라면 바다를 거쳐 신라에 온 불교는 곧 소승불교를 뜻할 것이다.

 

소승불교가 먼저 들어왔다는 최치원

 

 

최치원은 대승 및 소승불교가 들어온 순서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그 교(불교)가 일어나는데 비파사(毗婆娑)가 먼저 이르렀으니 곧 사군(四郡)으로 사체(四諦)의 바퀴가 달렸고, 마하연(摩訶衍)이 뒤에 이르니 한 나라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其敎之興也, 毗婆娑先至則四郡 驅四諦之輪, 摩訶衍後來 則一國耀一乘之鏡]”

 

이땅에 불교가 전해진 순서는 비파사(毗婆娑)가 먼저이고 나중에 마하연(摩訶衍)이 이르렀다는 것이다. 비파사는 불교학자 남동신도 소승불교로 해석하고 있다. 마하연은 고대 인도어 마하야나(Mahā-yāna)의 음역으로 대승불교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사군(四郡)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불교학자 남동신은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으로 해석했다. 사체(四諦)는 네 가지 진리로서 고체(苦諦)·집체(集諦)·멸체(滅諦)·도체(道諦)를 뜻한다. 소승불교가 먼저 들어왔고, 그보다 늦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대승불교가 들어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비문을 쓴 최치원은 비문 첫머리에 ‘자신이 국왕의 명으로 당나라에 갔다 온 사신이자 신라의 서서원(瑞書院) 학사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자금어대는 당나라 황제에게 받은 것이니 자신은 당나라와 신라 양국에서 통하는 국제적 학자라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최치원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비에 쓴 관직명으로 유추하면 진성여왕 7년(893)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인종 23년(1145)보다 250여년 이르다. 당나라에 유학해서 열여덟 살의 나이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고, 황소(黃巢)의 난 때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유명한 〈격황소서(擊黃巢書)〉 즉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 학자였던 최치원이 말하는 불교전래 기사를 부정할 근거도 없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당서(唐書)에 최치원 열전을 싣지 않은 이유[唐書不立崔致遠傳議)]〉라는 글에서 《당서》에 〈최치원 열전〉이 없는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국제적 지식인 최치원은 소승불교가 먼저 이 땅에 들어왔고, 대승불교가 나중에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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