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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북부, 문화로 다시 정의하다!] ④ 평화교과서, 마을박물관 - 연천 신망리, 백학면

경기문화재단, ‘DMZ도시’ 가시화 작업... 마을박물관
현재 파주, 연천, 동두천에 4곳... 지역 주민들 중심
전쟁과 분단의 한 가운데서, 과거를 기억하고 평화를 기약하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북부지역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특별한 희생에 대한 특별한 보상’ 실현이 중심축을 이루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가치와 비전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순한 방위적 개념의 구분이 아닌, 순수하게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정체성과 정주의식을 담보해내기 위한 노력들이다. <편집자주>  

 

① 권역별 문화적 특징 담은 정체성 확립

② 거점이 필요하다! 왜 동두천인가?

③ 음악과 그래피티 아트의 랜드마크    

④ 평화교과서, 마을박물관 - 연천 신망리, 백학면

⑤ 평화교과서, 마을박물관 - 동두천 턱거리, 파주 마정2리

⑥ 에필로그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강헌)이 경기북부 지역 가운데 직접 접경지인 파주와 연천, 그리고 동두천과 의정부, 양주, 포천 등을 문화적 특징으로 묶어 ‘DMZ도시’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정의했다.

 

DMZ에서만 볼 수 있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사는 마을 주민들의 삶 자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의미가 깊었던 까닭이다.

 

특히나 그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간접 경험했던, 또한 이를 보고 자라면서 어느새 부모님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이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어느 것 하나 동떨어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에코뮤지엄을 표방한 ‘지붕 없는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단순히 소장품 진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닌, 지역의 문화 특색과 환경에 따라 여러 모습의 살아있는 마을박물관을 만들겠다는 큰 그림을 그린 것이다.  

 

 

마을박물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니 긴 한숨부터 나온다. 기획 취재를 위해 겨우 2박3일 일정으로 해당 지역을 돌아봤을 뿐인데, 가슴속에 오롯이 새겨진 뜨거운 무언가가 뭉클하게 올라오는 느낌이다. DMZ 투어를 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진행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접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야릇한 감정은 뭘까? 어느날 갑자기 마주한 낯선 풍경과 사람들이, 도대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걸까? 질문과 동시에 답은 얻어졌다. 실화 속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들려준 이야기들의 생생한 힘이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조만간 다시 한 번 그들을 만나기 위한 발길을 떼지 않을까 싶다.  

 

현재 마을박물관은 연천에 2곳, 동두천과 파주에 각각 1곳이 운영되고 있다. 철저하게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주민들에 의해 그 모습을 하나하나 갖춰가고 있는 마을박물관 속으로 들어가보자. 머지 않은 미래 평화교과서를 미리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신망리 마을박물관, 피난민 정착촌 ‘뉴 호프 타운(New Hope Town)’

 

신망리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영화 한 편의 시나리오가 나오고도 남을 만큼이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한국군과 유엔이 38선 이남까지 퇴각한 사건, 1·4후퇴. 이 명칭은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한 1951년 1월 4일에서 비롯됐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아군이 반격에 나섰고 3월 14일 마침내 서울을 되찾았다.

 

그리고 3월 24일 38선 이북 지역으로 진격, 5월 무렵 연천·평강·철원·김화·인제·고성 등지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밀고 밀리는 싸움이 거듭된 전쟁은 19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연천 백학면과 신망리 등에선 무려 160여 회에 달하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고 하니, 상상하는 일 조차 끔찍하고 버겁다. 여하튼, 당시 피난민들을 위해 1954년 미군 7사단이 설계하고 자재를 제공해 세운 마을이 바로 신망리다. 또한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뉴 호프 타운’이다.

 

물론 원래 상태로 남아 있는 구호주택은 현재 없지만 일부 가옥에서 그 원형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특히 도시계획 형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신망리 주민들의 삶은 어땠을까? 

 

 

신망리 마을박물관에서 만난 이상준 미디어작가는 “여기 계신 주민분들은 피난시대에 오셨던 탓에 많이 경직돼 있으셨다”면서, “그분들의 히스토리를 조사하기 위해 2년 여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모두의 마음 속 집에 방공호 같은 지하 벙커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세월이 무수히 흘렀 건만, 이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인 듯해 심장 언저리가 아렸다. 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폭격장이 들어와 있었고, 주민들은 연습이 끝날 때를 기다려 탄피가 떨어진 곳으로 뛰어올라갔다. 고물을 팔아 돈을 벌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쯤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발탄을 밟아 죽기도 하고, 신체 일부가 잘린 사람도 있었다. 미군에서 버린, 땅속에 묻힌 소시지를 파내 끼니를 연명하기도 했다. 그런 마을을, 이제는 운행이 중단된 신망리역이 쓸쓸하지한 굳건히 입구를 지키고 있고, 다시금 활기를 찾기 위한 노력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월 15일 문을 연 마을박물관을 중심으로 새롭게 변모할 신망리의 따뜻한 미래를 기대해본다.  

 

 

◆백학역사박물관과 영웅 군마 ‘레클리스’

 

DMZ 최접경지역, UN 최초 연합군 편성 참전, 16개국 세계의 젊은 청춘들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전쟁, 지금도 남과 북이 휴전선을 경계로 대립하고 있는 DMZ마을. 이것이 연천군 백학면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분단의 아픔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간직한 채 7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오고 있는 곳, 38선과 휴전선이 교차하는 연천의 서부지역 또한 백학면을 지칭한다. 지난 2018년 11월 22일 개관한 백학역사박물관은 그러한 100년의 역사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역시나 마을 주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박물관의 시작부터 줄곧 함께해온 이상경 DMZ레클리스협동조합 이사는 “전쟁이라고 하면 대부분 군인들 위주로 돼 있는데, 우리는 전쟁에 꼭 필요한 여러 가지를 했던 비전투요원에 주목한 것이 특징”이라면서, “총, 칼 들고 싸우는 것은 군인이지만, 숟가락이나 냄비로 혹은 돈으로라도 동참했던 주민들의 이야기, DMZ 안에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아 보여주고자 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또한 지금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선 다같이 열심히 살아야하고, 그것이 애국이자 해야할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과거 이 땅에서 평화를 위해 피를 흘리고 희생했지만 잊혀진 분들,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찾아보자고 시작한 일이 마을박물관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상경 이사는 “2015~2016년 찍은 사진들인데, 불과 5~6년 사이에 많이들 작고하셔서 몇 분 안 남아 계신다. 그때라도 해놓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여기에는 노무자 부대원들도 있고, 군인이셨던 분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백학마을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을 그린 벽화가 보인다. 그리곤 줄지어 걸려 있는, 수십 명의 어르신들 얼굴이 담긴 액자와 전쟁에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지뢰와 철모, 총 등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군인들의 손때를 발견하게 되는 일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인근 부대에서 3·1만세운동 벽화를 함께 그려줬음은 물론, 각종 무기에 대한 조언과 함께 위험한 전쟁 물품을 모형으로 바꿔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백학마을은 지난 2015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호국영웅정신 계승 마을 제1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 배경에는 지게부대, 6·25참전유공자, 레클리스, 이를 알리고자 하는 주민들이 많은 마을 등이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데, 충분히 공감이 갔다. 

 

 

‘무모한’이라는 뜻의 ‘레클리스’ 

 

“새벽 여명의 연기와 화염 속으로 말의 실루엣을 보고 내 눈을 믿지 못했다. 레클리스였다.” (헤럴드 워틀리 예비역 병장. 2013년 레클리스 동상 제막식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는 ‘아침해’라는 이름을 가진 말 한 마리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과 함께 ‘아침해’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산악지역이 많은 한국에서 탄약 공급에 어려움을 겪던 미 해병 무반동화기 소대의 에릭 페더슨 중위가 ‘아침해’를 군마로 구입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이때를 아예 ‘아침해’의 미군 입대일로 기록했다.

 

‘아침해’는 최전선의 해병대원들에게 탄약과 포탄을 나르는 임무를 수행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말이다. 이후 미군 병사들은 ‘아침해’에게 무모한이라는 뜻의 ‘레클리스(Reckless)’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1953년 3월, 미 해병과 중국군이 맞붙은 ‘연천전투(네바다 전투)’를 포함해 ‘레클리스’는 보급기지와 최전방 고지를 386회나 왕복하며 수백 톤의 탄약을 날랐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클리스’는 1959년 미국 해병대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부사관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계급은 하사였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신연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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