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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서기 4년 신라 남해왕이 창건한 금강산 유점사

가야불교 이야기⑤

 

 

월지국을 거쳐 신라에 온 불교

 

고려의 국가 사관인 동수국사(同修國史) 민지(閔漬:1248~1326)가 쓴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楡岾寺史蹟記)〉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원년(서기 4년)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쓰고 있다.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이라고 쓴 것보다 368년 전이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창건 연기(緣起)를 기록한 글인데, 유점사란 느릅나무(楡) 고개(岾)에 있는 절(寺)이란 뜻이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석가가 열반한 후 문수보살이 사람들을 시켜 53개의 불상을 주조하게 한 후 종에 넣어 바다에 띄웠는데, 혁치(赫熾)가 왕으로 있던 월지국(月氏國)에 도착했다가 다시 “여러 나라를 거쳐 금강산 동쪽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는데, 이때가 신라 남해왕(南解王) 원년”이라는 것이다. 고려 사관 민지가 《삼국사기》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신라고기》를 근거로 서기 4년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쓴 것이다.

이 종과 53개의 불상은 인도에서 월지국을 거쳐 신라에 전해졌다는 것인데, 이 월지국은 어디를 뜻할까? 월지국은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1세기경까지 존속했던 나라이다. 월지(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라고도 하는데, 《사기》 〈흉노열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중국의 전국시대 때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성했는데, 월지(月氏)도 세력이 왕성했다.”는 기록이다. 8세기 경의 당(唐)나라 학자였던 장수절(張守節)은 《사기(史記)》 주석서인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편찬했는데, 월지국에 대해서 역사지리지인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서 “양주(涼州), 감주(甘州), 숙주(肅州), 연주(延州), 사주(沙州) 등의 땅은 본래 월지국(月氏國)이다.”라고 말했다. 이 지역들은 대략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일대로서 바닷가가 아닌 대륙이다. 월지국은 한때 흉노 황제인 선우(單于)가 자신의 태자 묵돌(冒頓)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로 강력했는데, 《사기》 〈흉노열전〉에는 선우묵돌이 흉노로 귀국한 후 월지국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노상선우(老上單于)는 월지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로 마시는 그릇을 만들자 월지 사람들은 멀리 떠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북천축국(北天竺國)이다. 북천축국은 인도의 고대 오천축국(五天竺國)의 하나로서 인도 서북부 지역에 있던 여러 나라의 총칭인데, 당나라 승려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약 20여 개의 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파키스탄과 경계인 펀자브 지방과 중국과 경계인 파슈미르 등지에 있었는데 불교가 크게 성행했던 지역이다. 이 북천축국에 속했던 여러 나라 중에 민지가 말한 월지국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의 사료가 없는 이상 알 수 없지만 《신라고기》에 굳이 월지국을 거쳐 왔다고 특정했을 때는 무슨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고려 때 남아 있던 관련 지명들

불상을 담은 종이 도착한 금강산 동쪽의 안창현(安昌縣)에 대해서 《고려사》 〈지리지〉 동계(東界)조는 “안창현은 본래 막이현(莫伊縣)인데, 현종 9년(1018)에 지금 이름(안창)으로 부르고 〈고성현에〉 내속(來屬)시켰다.”라고 말하고 있다. 불상을 실은 종이 강원도 북부 고성현 지역에 도착했다는 것인데,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현(縣) 사람이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급하게 고성현의 관리에게 말했다. 그날 저녁 불상은 종을 들어 올려서 땅으로 올라왔다. 현재(縣宰:수령) 노춘(盧偆)이 이를 듣고 관리와 노비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남은 발자취만을 볼 수 있었는데 진흙에 종이 찍힌 자리가 완연했다. 또 풀과 나뭇가지를 보니 금강산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안창현이 소속된 고성현의 수령 노춘이 급하게 달려갔더니 발자취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민지는 《신라고기》의 기사와 자신이 직접 답사한 경험을 섞어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를 썼는데 이 종 및 불상과 관련된 지명이 고려 때 금강산 곳곳에 남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민지는 “금강산을 향해 30리쯤 가보니 풀을 깔아 종을 두고 쉬어간 자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그곳을 지금은 게방(憩房)이나 소방(消房)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종을 두고 쉬어갔던 자리를 ‘쉬던 곳’이라는 뜻의 게방이나 소방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또 문수촌(文殊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문수보살이 비구의 몸으로 나타나서 불상이 간 곳을 알려준 곳이라는 것이다. 문수촌에서 천여 보를 더 가면 우뚝 솟아 있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그 앞 돌에 비구니 한 명이 걸터앉아 있다가 불상이 서쪽으로 갔다고 말하고 사라졌는데, 이 비구니가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이었다면서 그 바위를 ‘비구니가 놀던 바위’라는 뜻의 니유암(尼遊巖) 또는 니대(尼臺)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니유암 앞으로 가면서 만인봉(萬仭峰) 앞에서 길을 돌리려 하자 백구(白狗)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꼬리를 흔들면서 길을 인도했는데, 이를 ‘개 고개’라는 뜻의 구령(狗嶺)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고개를 넘으려다가 목이 말라서 방향을 바꾸자 연못이 나타났는데, 이 연못을 고성태수의 이름을 따서 노춘정(盧偆井)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노춘정과 노춘사

 

민지가 말하는 이런 지명들은 고려 때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때도 남아 있던 지명들이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1589~1670)가 유점사를 답사하고 ‘노춘정(盧偆井)’이라는 시를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후기의 학자 서종화(徐宗華:1700~1748)는 ‘노춘사(盧偆祠)’라는 시를 썼다. 노춘정이 고성태수 노춘을 기리는 우물이라면 노춘사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서종화는 이 시에서 “내가 유점사에 갔더니/불우(佛宇)가 어찌나 휘황한지/그 동쪽 작은 전각이 있고/그 안에 한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상)이 있는데/승려도 아니고 도사도 아닌데/이마 위에 오모(烏帽:검은 모자)를 쓰고 있네…”라고 시작하고 있다. 서종화는 유점사의 승려에게 누구의 소상이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고성군수인데/이름은 춘(偆)이고 노(盧)는 성”이라면서 53개의 금불(金佛)이 종을 타고 바다를 건너서 금강산에 들어왔을 때 태수가 노춘이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서종화는 “그대는 이를 불신하지 말라/옛 기록을 지금도 완상할 수 있다”면서 “노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하나 모두 어그러지지 않으며, 고려의 민거사(閔居士:민지)가 글을 지어 증명했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 남해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이다. 서종화는 중종반정 이후 쫓겨난 중종의 원 부인 신씨(愼氏)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비복위수의(愼妃復位收議)〉를 쓴 유학자임에도 민지의 글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남해왕이 창건한 유점사

 

민지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서 불상과 종이 가는 곳마다 이적(異蹟)이 나타났다면서, 노루를 본 곳은 장항(獐項:노루목)이고, 종소리를 들은 곳은 환희령(歡喜嶺)이라고 말했다. 민지는 “종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작은 고개를 넘자 한 골짜기가 나타났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가운데 큰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느릅나무의 가지에 종이 걸려 있었고, 불상은 연못가에 가지런히 늘어놓아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때 기이한 향기가 풍기고 상서로운 구름이 고운 빛깔로 날아갔는데, 노춘과 관속(官屬)은 기뻤지만 자만하지 않고 극진하게 우러르며 경례하고 돌아가 이 일을 국왕에게 아뢰었다”는 것이다. “남해왕은 경이롭게 여겨서 가마를 타고 행차해서 (불가)에 귀의하고, 그 땅에 절을 지어서 종과 불상을 안치했는데, 느릅나무로 때문에 절의 이름을 유점사로 삼았다”는 것이다. 고려의 동수국사 민지는 《신라고기》를 근거로 금강산 유점사가 서기 4년 남해왕이 창건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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