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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당신이 돌아갈 수도, 나아 갈 수도 없다면

 

전쟁은 세 단계로 나뉘어진다. 전전(戰前)과 전쟁 중, 그리고 전후(戰後)이다. 어느 단계가 가장 고통스러운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 중보다는 전후가 그렇다.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적에게 자신을 팔아 먹었다면 그 일을 과연 어떻게 잊고 살겠는가. 그에 대한 원한을 어찌 쉽게 떨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보다 더, 더, 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은 상대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다소 모호할 때이다. 팩트도 불분명한데다 그 배신이 배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석될 때이다. 살다 보면 진실은 늘,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호함이 만들어 내는 불신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법이다. 회복되지 못하는 관계의 이어짐이 삶을 파국으로 만든다. 전쟁 후에는 대개,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로 살아간다.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건 곧 재건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복구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독일 현대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적 아우라의 폭이 가장 넓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피닉스’가 바로 그런 얘기다. 주인공 넬리(니나 호스)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다.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도 얼굴이 엉망이 됐다. 아마도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은 거의 짓이겨진 상태다. 그런 그녀를 친구인 레네(니나 쿤젠도르프)가 전쟁 직후 간신히 찾아낸다. 그리고 뛰어난 의사를 고용해 성형수술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 낸다.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넬리에게는 막대한 유산이 있다.

 

얼굴이 회복되고 나니 넬리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헤어진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를 찾으려 한다. 문제는 넬리가 유대인임을 고발한 장본인이 바로 남편이라는 사실이(라고 레네가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편이란 작자는 과거 아내였던 여자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기행각을 벌이려 한다. 친구 레네는 넬리에게 그 점을 경고하지만 여자는 일단 남자부터 찾겠다는 심정이다. 레네의 말을 다 믿지는 않는다. 설마하는 생각도 있다. 그보다는 사랑했던 기억이 더 강하다.

 

넬리는 결국 남편을 찾긴 찾는다. 하지만 과거 남편은 성형으로 바뀐 아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왠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정도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내 대역을 시키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아내가 생환했다고 거짓으로 알리고 그녀와 재결합하는 척, 여자의 재산을 가져와 서로 나누어 갖자는 제안을 한다. 이제부터 진짜 아내는 가짜 아내가 되어 진짜 아내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남자는 끝까지 여자를 긴가민가해 한다. 넬리는 넬리대로 점점 더, 이 남자가 자신을 신고한 게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혼란스러워한다. 두 남녀는 혼돈의 사랑이 그나마 각자가 안고 살아가는 과거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인지, 실낱같은 희망으로 자신들의 연극을 이어 나간다. 그 과정이 눈물겹게 펼쳐진다.

 

‘피닉스’는 현대영화가 보여 준 러브 스토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인 척하는 것뿐일 수 있다. 두 남녀의 관계를 통해 독일의 역사를 치환시켜 보여주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이 이 영화의 텍스트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넬리의 얼굴은 전후 독일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런 그녀를 치료하는 솜씨 좋은 의사는 전후 독일을 점령했던 미군과 미국을 의미한다. 의사는 넬리에게 권한다. “아주 다른 얼굴을 만들어 드릴 수 있소. 그게 더 좋을 겁니다.” 그러나 넬리는 가능한 한 과거의 얼굴에 가깝게 복원해 달라고 애원한다.

 

 

미국의 간섭과 지원 하에 이루어진 전후 독일의 재건 과정이 독일 국민들의 자존심에 얼마나 상처를 입혔었는가를 은유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항상 흥청대는 곳은 미군 전용 재즈 클럽이다. 그곳에서 독일 여자 무희들은 벌거벗은 몸을 팔아 살아가고, 남자들은 허드렛 일로 품을 팔아가며 살아간다. 한때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였던 남편 조니는 재즈클럽의 불목하니로 끼니를 이어 간다.

 

어쨌든 넬리는 그렇게 가까스로 예전 모습을 되찾으려 애쓰지만 ‘전 남편 조니=독일의 어리석은 민중들’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제는 돈, 돈, 돈만을 생각하며 살 뿐이다. 언제 자신이 배신했었냐는 듯, 언제 자신들이 나치와 히틀러를 선거로 뽑은 적이 있었냐는 듯, 과거의 잘못과 악행을 이런저런 변명을 동원해 가며 다시 이어가려 할 뿐이다. 넬리의 마음은 그래서, 평화를 얻지 못한다. 독일이 오랫동안 전후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쩌면 여태껏 치료되지 않았다고,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은 말한다. 펫졸드는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일그러뜨리는지,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 인간관계를 얼마나 파괴시키는 지를, 무엇보다 그 상처가 얼마나 영원한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보고 있으면 심하게, 아주 심하게, 마음이 아프다. 독일의 역사와 가장 근접한 나라는 바로 우리들이다. ‘피닉스’는 독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얘기인 셈이다. 우리에게도 넬리와 조니, 레네와 같은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넬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고 또 사랑했던(친구로서든 동성의 연인으로서든) 레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이제…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어.” 아마도 레네는 히틀러의 독일 치하에서 몇 안남았던 독일의 지식인층을 대변하는 것일 수가 있다.

 

레네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가 또 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지켜보기가 힘들다. 과거에 매달릴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만 나아 가기에도 풀어야 할 문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레네의 선택이, 그리고 넬리의 선택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멍하게 할 만큼 가슴을 친다.

 

두 여자가 처한 운명의 기로는 마치 영화 ‘이다’에서 안나와 완다가 처한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기시감을 준다. ‘이다’는 폴란드 파웰 파우리코우스키 감독의 2015년 작품이었다. 하긴 그 영화도 전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었다. 유럽의 감독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아픈 과거사, 치욕의 역사를 영화로 정리해 내고 있다. 그 노력에 경외를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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