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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사잇길을 걷다] ⑥ 의학교육과 사회복지의 선구자, 해관 오긍선

 

海觀(해관) 오긍선 선생(1878~1963, 교육자 의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 한국인 교장을 역임하고 현대의학 도입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일생 동안 우리나라 의학 발전과 사회사업에 헌신하시다. (연보비)

 

나(오긍선)의 호 해관(海觀)은 인류를 생각하면서 온 세계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김영식 작가는 2008년 ‘신동아’에 ‘망우리별곡’을 연재하며, 망우리에 먼저 오신 지석영 선생(1855~1935)과 나를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양대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즉 1899년 설립된 관립(국립) 의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지석영 선생은 국립 서울의대의 초대 교장인 셈이고, 나는 사립의 대표적인 연세의대의 초대 (한국인) 교장이니, 지 선생과 나 두 사람만으로도 망우리는 의학계의 성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에 지 선생의 동상이 있듯,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 앞에는 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 101인-그와 나 사이를 걷다’(2023)이라는 책에서 덧붙이길, 망우리에 있는 경성의전 출신 경성제대부속병원의 유상규와 세브란스병원의 오한영(나의 장남), 이영준(나의 제자)이 1930년 창립된 조선의사협회(현 대한의사협회)의 주역들이니 망우리는 의학계 성지로서의 의미를 더한다고 했다. 그들의 묘가 나의 주위에 있다.

 

나아가 그는 ‘망우리 사잇길에서’(2023)라는 책에서, 전북대 김근배 교수의 논문 ‘한국의 과학기술자와 과학 아카이브’에서 선정한 ‘100인의 근현대 과학 기술자(1880~1970년대)’에 망우리의 지석영, 오긍선, 이영준, 김호직(콩박사) 등 네 사람이 뽑혔으니, 망우리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선구자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라고 썼다.

 

나는 9대조 오윤겸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공주의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친 오인묵은 감찰(監察) 벼슬을 지냈다. 묘역 입구에 ‘감찰 오인묵 적선비’가 세워져 있다. 흉년 때 곡식을 베풀어 준 것 등에 대해 군산의 소작인들이 1926년 세워줬는데 선친은 그것을 보고 곧바로 땅에 묻게 했다. 토지가 공장지대로 편입돼 자식으로서 이 비가 사람들에게 짓밟힐까 걱정되어 1939년 여기로 옮겨 왔다.

 

 

한학을 공부했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돼 1896년 상경해 내부(내무부) 주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서재필 선생의 독립신문, 독립협회의 활동을 보며 신학문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해 그해 10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에서는 2년 선배 이승만과 독립협회 간사로 함께 일했다. 만민공동회 집회를 정부가 탄압하자 체포를 피해 공주의 선교사 스테드먼의 집에 피신했는데, 그 인연으로 배재학당 졸업 후에도 선교사들을 돕다가 1902년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렉산더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켄터키주 센트럴대학을 거쳐 루이빌의과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때는 그 지역에 동양인이 거의 없어 내가 거리에 나가면 아이들이 신기하다고 따라다녔다. 1907년 졸업하고 8월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으로 파견됐다. 한국인 의료선교사로서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귀국 후, 순종 황제는 내게 황실의 전의를 권유하고 이토 통감은 대한의원(서울의대병원의 전신) 의관을 제안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군산으로 내려와 예수교병원장으로 부임해 의료선교사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부임 다음 해, 기독교 신자가 된 선친의 도움으로 군산 구암리 장로교회를 건립하고 또한 교육선교사업으로 구암교회 주일학교를 안락학교(초등)로 확대 설립하고 중등 과정의 영명학교도 세웠다. 선친은 구암교회 장로로 장립되어 주일이면 멀리서 온 교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일을 낙으로 삼으셨다. 1910년에는 광주예수교병원장, 1911년에는 목포예수교병원장을 맡으며 정명여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그렇게 의료와 교육, 선교에 힘쓰던 중 1912년 세브란스의학교가 교파 연합의 학교가 되자 나는 남장로교 대표로 파견되어 교수 및 부속병원 의사로 임용됐다. 일제가 요구하는 교수 조건을 갖추기 위해 1916년 도쿄대학에서 피부비뇨기학을 1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1917년 피부과를 한국 최초로 창설했다. 1921년 학감으로 임용되어 9년, 부교장으로 4년간 의전을 경영하고 1934년 초대 교장 에비슨의 권유로 세브란스의전 2대 교장이 됐다.

 

그러나 중일전쟁 후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총독부와 때로는 적절히 타협하기도 하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총독부의 일본인 교장 임명 압력을 물리치고 1942년 1월 퇴직, 제자 이영준에게 교장직을 물려줬다.

 

 

해방 후에는 트루먼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 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기독교 관련으로 1946년 YMCA 이사, 1949년 성서공회 이사장, 1952년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을 맡았고 그 외로는 보육원,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에 나섰다.

1918년 남대문시장의 고아들을 모아 보육사업을 시작하고 1919년 한국인 최초의 경성보육원을 설립해 고아를 보호 육성하는데 공로가 크다고 해 1962년 소파상을 받았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가 나의 묘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인연이 남다르다. 경성보육원은 1936년 안양으로 옮겨 안양기독보육원, 해관보육원을 거쳐 2007년 ‘좋은집’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른다. 올해 108년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아동양육시설이다.

 

그렇게 말년을 고아들과 함께한 나는 어느 날 나의 명이 다한 것을 자각해 복약도 거부하고 1963년 5월 18일 85세를 일기로 서대문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5월 22일 새문안교회에서 연세의대학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망우리 가족 묘지로 들어왔다. 그해 8월 15일, 내게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지금의 금관문화훈장에 해당한다.

 

나의 제자이자 3대 교장 이영준(李榮俊)은 타고난 지도력과 소통력으로, 일제로부터 학교를 잘 지켜냈다. 1927년 졸업 후 나의 조교가 됐고, 세브란스 출신 임상의로는 최초로 1933년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피부과 주임교수와 부속병원장을 거쳐 1942년 세브란스 3대 교장(~1945)이 됐다. 해방과 동시에 교장을 물러나 정계로 진출했다. 한민당 재정부장 및 간사장, 4선 국회의원(4, 5대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고 1968년 72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망우리 우리 가족 묘지의 왼쪽 자리로 들어왔다.

 

내 가족이 영면한 묘지는 봉분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서양식이되 전통을 살린 모양이다. 나의 삶 자체가 그러했다. 우리 부부의 왼쪽은 부모님이, 밑에는 나보다 먼저 간 장남 오한영 부부가 들어와 있다.

 

오한영(吳漢泳 1898~1952)은 1923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 의학박사를 받았다. 세브란스 교수와 병원장을 지냈고 6·25 때 국립경찰병원장을 거쳐 1950년 11월 제2대 보건부 장관이 됐다. 우리나라 보건행정의 기초를 쌓았으나 과로로 인한 고혈압 악화로 1952년 4월 55세의 나이에 부산에서 급서했다.

 

 

그리고 1973년 이후로 망우리에 새로운 묘가 들어서지 못해 가족 묘역에 들어오지 못한 자손을 소개한다. 조선일보 1995년 1월 18일 자에는 당시 4대 30여 명이 의사인 명문가로 소개됐는데, 직계 손자까지만 말한다.

 

차남 오진영(1911~1981)은 1936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국학대학 교수, 1948년 감찰위원회(감사원) 감찰관, 주일대표부 상무관, 홍대 법대 교수를 역임한 후 1963년 나의 뒤를 이어 고아원을 운영했다. 며느리 윤의경은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여동생이다.

 

오한영의 장남 오중근(1923~1983)은 1958년 국립의료원 의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해 1975년부터 국립마산결핵병원장으로 8년간 재임하다 정년퇴직을 1년 앞둔 83년 7월 순직했고, 차남 오장근(1927~2009)은 국립철도병원장, 국립서울병원장을 거쳐 1981년부터 해관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장근의 아들 즉 나의 증손자 오익환이 해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손들은 개인 병원을 열지 않고 기관이나 교육 분야에서 일했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의료가 축재의 목적이 돼서는 아니 되며 개업의가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조선에 가난한 사람이 더 생긴다. 한국에 와서 청년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서양 사람도 있는데 한국 사람으로서 어찌 명리에만 치중할 수 있겠는가.”

 

[ 경기신문 = 서혜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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