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 남쪽 산속에 위치한 산간 마을 고주동. 한자로는 ‘창고(곳집) 고(庫)’ ‘살 주(住)’를 쓴다. 다른 마을은 대부분 해안이나 포구와 접해 형성됐으나 고주동은 해안에서 떨어져 있으며, 이 섬에서는 가장 오지(奧地)의 마을로 꼽힌다. 행정구역은 옹진군 대청면 대청5리이며, 2022년 4월 현재 43세대 79명이 거주하고 있다. 선진동 영감낭뿌리 넘어 ‘논아래’에서 서쪽 삼각산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로 서쪽은 삼각산(343m), 북쪽은 뾰족산(228m), 동쪽은 판안구미(板案仇味)산(129m), 남쪽은 숫굿산(180m)으로 둘러싸인 산촌이다. 이민족 등 이방인의 출입이 드물었던 산속의 안전한 마을, 대청도의 안전지대로서 학골 밑의 좁은 평지를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 고주동(庫住洞) 지명유래의 역사 흔히 지명에서 쓰는 ‘고’는 ‘높을 고(高)’ 혹은 ‘옛 고(古)’를 사용하지만 ‘창고 고(庫)’자는 흔치 않는 경우인데, 그렇다면 이 한자어를 택해서 쓰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이 마을의 역사에서 창고와 관련한 내막을 알아보자. 이 마을의 옛 지명을 보면 ‘창고 고(庫)’, ‘집 사(舍)’자의 고사동(庫舍洞)으로 표기한 경우가 있는데, 이 해석은 물자를
모래울동은 대청도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구역상 대청면 대청4리에 속한다. 모래울동이란 명칭은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에 ‘모래 사(沙)’ ‘제방 언(堰)’이 합쳐진 ‘사언동(沙堰洞)’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지두리와 오지낭 사이로 강한 물살이 만(灣)으로 형성된 모래울 장수리 일대로 모래를 몰고 들어와 마을 앞의 남산에 큰 모래언덕이 생기게 되면서 부르게 된 것이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명칭 변경 때 ‘모래 사’, ‘여울 탄(灘)’의 합성어인 ‘사탄동(沙灘洞)’으로 개칭했으나 발음상의 문제로 현재는 ‘모래울동’이라 부른다. 2022년 4월 현재 40세대 61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으로 큰등재를 넘으면 고주동이고 서쪽은 갑죽도가 바로 보인다. 남쪽은 공동묘지 너머 기르마가리 해안 장수리이고, 북쪽은 지두리 산줄기에 있는 서내동 고개를 경계로 하고 있다. 이렇듯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촌이면서 바다가 보이지 않는 마을이기도 해 삼각산 중턱에서 바라보면 육지와 바다 경계면의 안락한 분지에 형성된 별유천지(別有天地)라 비견될만하다. 모래울동은 지형이 주는 풍광 자체의 신비감과 사시사철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자연의 멋스러움이 있으며, 아직 때 묻지 않고
두무진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 횟집 상가 왼쪽에 ‘두무진’이란 표지석과 함께 콘크리트 기단부 위의 검은색 비신(碑身)에 새긴 비명(碑銘)이다. 그리고 기단부에 씌여진 작은 글씨의 내용은 접적지역의 가슴 아픈 묵직한 내용이다. 일부를 소개하면 ‘1970년 7월 9일 23시경 군사분계선 남쪽 4마일 해상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 괴뢰 함정은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들에게 발포를 가하면서 우리 어선들을 북으로 나포해 가다. 이때 북괴에 잡혀가지 않기 위하여 결사의 노력으로 뱃줄을 끊고 도망하려던 최상일은 저들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라는 내용이다. 1970년 7월 발생했던 사건이었으니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전국적 규모의 사건이 아니기에 쉽게 잊혀질 지라도 주변 접적지역 도서민이나 가족에게는 평생 가슴의 멍이다. 필자는 작년부터 비석 속 인물의 유가족을 만날 계획을 갖고 있던 중 한 분이 이 섬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최근 댁에서 만나 살아온 인생 얘기를 들어봤다. ▶ 어린 시절, 결혼 그리고 남편의 사망 비석 속의 최상일(1933년생)씨와 미망인 이○경(1938년생)씨는 사항포 출신으로 한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웃사촌처럼 지낸 사
옥죽동(玉竹洞)은 행정구역상 대청면 대청3리, 대청도의 북쪽 해안에 있으며 선진포구가 한적했던 시절 대진동(大津洞)과 함께 대청도를 대표하던 포구로서 명성을 떨쳤다. 선진동에서 검은낭 모래고개를 넘어오다 내동과 옥죽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달리면 옥죽동에 닿는데, 2022년 3월 현재 97세대 177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쪽은 북한의 황해도 옹진반도의 서쪽 섬들이 보이고 서쪽은 축동을 기점으로 양지동, 동내동과 접하고 있다. 남쪽은 검은낭 산줄기를 경계로 선진동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백령도 동쪽 끝과 마주하고 있다. 옥죽동의 옥죽포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에는 ‘내동은 북쪽 높은 산봉우리 아래 지역으로 지금은 기와 조각이 나오는데 원 순제의 옛터라고 한다. 그 아래는 옥자포(玉子浦)’라 기록하고 있어 내동과 인접한 ‘옥죽동’이 ‘옥자포’임을 알 수 있다. 이 포구는 대청도의 역사와 함께하는 포구로서 오랜 과거부터 내동의 관문 역할을 했다. 관문(關門)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지점을 말하는바 고려의 원 간섭기 당시 순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50년 간 유배 생활할 때 드나들던 통로(출입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몸이 아픈 환자는 시기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법, 현재의 의료체계와 달리 백령도에 의료시설이 없던 시절 전국이 대동소이하겠지만 구전에 의한 민간요법 진료가 이뤄졌다. 예를 들면 지혈에는 조뱅이를 짓이겨 붙인다거나 설사에 양귀비 달인 진액을 손톱만큼 먹으면 낫는다는 사례를 들 수 있다. 또 마을 곳곳에 나름 유명한 침술사가 있어 주변 지역에서 문턱을 넘나들었으며, 그 중 한 분이었던 사곶의 유명한 침술사 이승욱 주부에 대해 기사화한 적 있다. 그렇다면 서해 최북단 백령도의 의료시설은 어떤 형태로 언제부터 있었을까? ▶ 백령도 의료시설의 역사와 종류 백령도의 의료시설은 병원, 보건소, 약방과 약국 등 크게 3가지가 있다. 먼저 병원은 천주교의 역사와 시기를 같이한다. 백령성당의 초대 부영발 신부의 부단한 노력으로 1962년 11월 ‘김안드레아병원’이 정식 허가를 받았다. 김안드레아병원은 백령도 최초의 의료시설이자 기관이었으며, 미국의 최신 의료 장비와 최고 의료진으로 구성된 종합병원이었다. 현지 주민은 물론 육지에서도 치료를 위해 백령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1973년 부영발 신부가 백령도를 떠난 뒤 천주교에서 병원 운영이 어렵게
선진동은 대청도 유일의 동쪽 해안선에 자리잡은 양항(良港)으로 행정구역상 옹진군 대청면 대청2리이며, 일명 배진포라 불리다가 현재는 선진포(船津浦), 선진동(船津洞)으로 불려지고 있다. 2022년 3월 기준 247세대, 384명으로 대청도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대청도의 문호(門戶)로서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연락선의 기항지(寄港地)이며, 현재 대청도의 발달은 선진동의 발달과 궤를 같이할 정도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영감낭재 밑에 어막 같은 4~5가구의 집만 있었을 뿐 한촌(寒村)에 불과했으며,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내동에 비해 인구수나 경제 규모가 절반에 미치지도 못했다. 그러나 1918년 일제에 의해 선진포에 포경회사가 들어서고, 이 항구를 서해 어업의 거점으로 삼게 되면서 경제 규모가 커지고 대청도의 중심지도 농업 중심의 내동에서 어업 중심의 선진동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20년대부터 광복 이전까지 고래잡이가 가장 대표적 어업활동이었다. 대청도 포경회사의 사업 시기는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대체로 추운 겨울에 영업을 했다. 대청도 일대에서 포획한 고래는 참고래, 대왕고래, 혹등고래 같은
대청도는 국가 지질공원의 명소가 있는 유명한 섬으로, 방문객의 감탄과 탄성을 자아낸다. 유배지로서 언급을 하자니 왠지 격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서풍받이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깍아지른 듯한 경관이 인간의 접근을 막는 고립된 지형을 만들면서 유배지로서 안성맞춤이었을지 모르겠다. ‘유배(流配)’는 고려, 조선시대 5가지 형벌 제도 중 가장 무거운 사형 밑에 해당하며 속칭 ‘귀양’이라 한다. 중한 죄를 범했을 때 차마 사형에는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국내 범죄자의 경우 대청군도는 주로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됐으며, 대청도는 2회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외자의 경우 이와 반대인데 외국인 유배지로서 대청도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 언제 왔는지 소개한다. ▶대청도에 유배 보낸 나라와 사람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역사 문헌에 의하면 백령, 대청, 옹진군 도서 지역에 외국인의 유배 관련 내용이 있는데 유배인의 숫자나 빈도로 보아 대청도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 그 중 가장 많이 유배를 보낸 나라는 원(元)이며, 인원수는 순제를 포함해 7명에 달한다. 기록상 다른 도서 지역이 1~2명임을 고려
대청도 내동에는 지금도 원 순제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청도 하면 순제, 순제 하면 대청도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이며 대청도 주민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원나라 역사에서 대청도는 반드시 언급되는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문헌에 등장하는 ‘도우첩목아’ 또는 ‘타환첩목이’로 기록된 인물은 중국 원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두 번째 황후가 고려사람 기황후(奇皇后)인 것으로 유명한 순제(몽골명 토곤테무르, 1320~1370)다. 사랑과 권력의 함수 관계를 주제로 ‘기황후’란 제목하에 과거 TV 드라마로 방영된 바 있다. 원래 ‘순제(順帝)’는 명나라 묘호(廟號)이고, 원나라 묘호는 ‘혜종(惠宗)’, 지정(至正) 연간에 제위에 올라 ‘지정제(至正帝)’라고도 불렸다. ▶ 대청도 유배, 그리고 원 황제 등극 순제가 태어날 당시인 1320년부터 13년 간 원나라는 7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왕권쟁탈전이 진행됐다. 순제는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하는 1330년(충숙왕 17)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반 정도 머나먼 대청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원사(元史)’의 기록에 의하면 ‘1329년 순제의 숙부 문종(文宗)은
내동(內洞)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 지형에 형성된 동네로 산록완사면에 가옥들이 위치하는데 대청1리 서내동, 대청6리 동내동, 대청7리의 양지동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마을 주위의 산은 삼각산(해발 343m)에서 시작해 동북쪽으로 뻗은 검은낭 산줄기와 삼각산 북쪽으로 뻗어나가 옥죽포 달래끝뿌리에서 멈춘 양쪽 산줄기 사이로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논으로 경작되는 넓은 들판은 대청면의 유일한 평지인데, 이곳은 지형이 낮아 서내동 쪽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마치 강과 같다 해 ‘강틀’이라 부른다. 현재 ‘강틀논’ 일대는 과거에 바닷물이 마을 깊숙이 들어오고 나가며 형성된 갯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내동 동북쪽에는 방사방풍림으로 소나무 군락지가 있고 방죽을 쌓았다 해 ‘축동(築洞)’이라 부르며, 여기에는 잡귀를 쫒아내는 수호신으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우람한 장승이 있었다 해서 다른 말로 ‘장승백이’라 부른다. 이곳을 경계로 옥죽동과 구별된다. 현재 내동에는 2022년 3월 기준으로 모두 317세대 471명이 살고 있으며 대청1리 146명, 대청6리 274명, 대청7리는 71명이 각각 거주하고 있어 동내동이 중심지 역
대청도(大靑島), 이 섬은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소청도를 경유해 종착항인 백령도 용기포에 도착하기 전에 두 번째 닿는 작은 섬이다. 소대백령 대청군도의 3개 섬은 역사적 지리적 관점에서 같은 문화권을 이뤘다. 특히 대청도는 역사적으로 긴 기간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에 소속돼 왔으며 1974년 7월 1일 ‘대청면’으로 승격돼 독자적 행정구역을 갖게 됐다. 한편 백령도와 별개의 소속을 가졌던 역사적 사례가 있으니 눈여겨볼 일이며 대청진 설치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 대청진의 설치 시기와 배경 18세기 중국 어선이 해적으로 빈번하게 출몰하자 대청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방어를 위한 건의가 있었고, 1793년(정조17) 좌참찬 정민시(鄭敏始)가 주민을 입주시켜 토지를 경작하게 하자고 건의함에 따라 황해도 수사에게 현지를 조사시켰고 그 보고서가 진상된다. 따라서 그 해에 대청도에 둔(屯,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지만 대청도 개간에 소요되는 기간이 길고 대청도민의 출도 희망, 해적 출몰 등 여러 요인이 겹쳐 1799년(정조23)에서야 건의가 착수된다. ‘만기요람’(軍政 海防編, 1808)은 ‘정민시의 건의로 대청도와 소청도에 각각 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