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체육부는 업무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전담반을 인천 미추홀타워로 옮겨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내년 5월 개관 예정이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한국인권도시협의회가 회원도시인 김정식 인천 미추홀구청장(맨 왼쪽) 등과 한국에 거주 중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17일 주한 러시아대사관 인근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SSG 랜더스 김광현이 16일 오후 오라카이 송도 파크 호텔 로즈홀에서 진행된 입단식에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안상수 전 인천시장, 인사차
▲ 유정복 전 인천시장, 인사차
우리나라 고래잡이의 시작은 국보로 지정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비롯된다. 태화강 건너편 깍아지른 암벽(셰일과 혼펠스로 구성)에는 바다, 육지 동물의 모습, 수렵이나 어로 도구 등 신석기인들의 희망을 모아 바위에 쪼아 새겼는데 그 중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 고래’ 등 다양한 고래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 유적의 연대는 견해차가 있지만 지금부터 7000~3500년 전이라고 하니 인간과 고래의 관계는 상당히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역사로 말하면 문자사용 이전에 해당하는 선사시대 중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동물을 바위에 새긴 이유는 생업이나 풍요기원 등 풍요와 안전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조선시대는 포경(捕鯨)에 관한 인식이나 기술의 부족, 관리의 수탈이 심해 오히려 포경 활동은 외면받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관아의 수탈 때문에 어민이 고래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떠밀려 온 고래가 발견되면 백성을 동원해 해부시키고 그 수익금은 관아에서 독점했으므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생사를 무릅쓰고 고래를 사냥해 보았자 역시
인천시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3일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옹진군 대청면에 설치될 대통령 선거 투표함을 배에 싣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0~1920년대 일제강점기, 이 당시 대청도의 유일무이한 대규모 어업활동은 고래잡이(捕鯨)였다. 2000년대에도 간혹 그물에 걸린 고래가 대청도 인근에서 발견돼 뉴스가 되곤 하는데, 이 주변에서 고래의 출현은 100년 전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포경산업으로 인해 대청도 내동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선진동 중심의 어업사회로 변화는 물론 선진동 일대 인구의 유입에 따른 주택 시설의 증가, 외국인 유입에 따른 전통적 미풍양속의 저해 등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이 섬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의 전언에 의하면 해방 전에도 포경선의 입항 모습부터 고래 해체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릴 때 매우 흥미진진한 볼거리였고, 배가 들어올 때는 대청도 주민이 모여 구경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우리나라 포경산업은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가 주도권을 잡고 시작하지만 결정적 전환점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의 후퇴와 일본의 독점적 무대가 됐다. 일본 포경산업의 절정기 시점에 해당하는 1927년 황해도 해주에 있던 ‘酉鮮日報支社’의 우에무라 기자가 쓴 대청도 포경장의 풍경을 통해 대청도의 고래잡이 모습을 알아보자. ▶숨어있는 대포경장
박남춘 시장이 3·1절을 맞아 수봉산 현충탑을 참배, 신은호 시의장(왼쪽)·도성훈 교육감과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조택상 균형발전정무부시장이 24일 시청 접견실에서 열린 '덕적고 야구부 지원 기부금 전달식'에서 윤태일 동성사 대표, 이성훈 동후디앤씨 대표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