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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67 - 대청도 고래잡이 이야기(상)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0~1920년대 일제강점기, 이 당시 대청도의 유일무이한 대규모 어업활동은 고래잡이(捕鯨)였다. 2000년대에도 간혹 그물에 걸린 고래가 대청도 인근에서 발견돼 뉴스가 되곤 하는데, 이 주변에서 고래의 출현은 100년 전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포경산업으로 인해 대청도 내동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선진동 중심의 어업사회로 변화는 물론 선진동 일대 인구의 유입에 따른 주택 시설의 증가, 외국인 유입에 따른 전통적 미풍양속의 저해 등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이 섬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의 전언에 의하면 해방 전에도 포경선의 입항 모습부터 고래 해체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릴 때 매우 흥미진진한 볼거리였고, 배가 들어올 때는 대청도 주민이 모여 구경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우리나라 포경산업은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가 주도권을 잡고 시작하지만 결정적 전환점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의 후퇴와 일본의 독점적 무대가 됐다. 일본 포경산업의 절정기 시점에 해당하는 1927년 황해도 해주에 있던 ‘酉鮮日報支社’의 우에무라 기자가 쓴 대청도 포경장의 풍경을 통해 대청도의 고래잡이 모습을 알아보자.

 

▶숨어있는 대포경장(大捕鯨場)

황해의 고도 대청도의 포경장은 동양포경회사(東洋捕鯨會社)가 경영하는데, 조선에서 가장 큰 포경장이다. 매년 적게는 30~40두(頭), 많게는 50~60두를 포획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그 규모의 광대함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파악할 정도지만, 섬이 너무 육지와 떨어져 있고 파도가 높아 건너는 사람이 적어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무렵에 섬에 도착하다

… 멀리 등대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여기가 대청도입니다!”라고 선장이 소리친 시간이 오후 8시경이었다. … 백령도 주재소의 순사 사사키씨와 포경회사의 장장(場長) 신타니(新谷勝藏)씨, 대청도의 원로 다나베씨가 정중히 환영선(歡迎船)으로 마중을 나왔다.

 

기름 섞인 가스가 바람에 불어 날리고 있었다. 고래의 살과 뼈, 시뻘건 냄새 나는 피가 일면(一面)에 넘쳐 지옥에 떨어진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신성한 물건을 보는 것처럼 대하는 학교의 학생과 섬의 유지분들의 마중을 받으며 스토브 의자에 자리 잡았다.

 

▶비린내 나는 피속에 살과 뼈, 내장이 흘러나오다

촛대를 한 손에 잡은 장장 신타니씨의 (포경)장내 안내가 시작됐다. 정말로 동양포경회사가 유일한 저장소(儲場所)로 만든 장비의 거대함은 대정 7년(1918)에 2만 5000원의 설비로 시설한 것인데, 매년 사와야마(澤山)가 비용을 투자해 적극적인 경영을 했다.

 

해부 역시 로프 장비로 기름을 짜내고 사이사이 교묘한 방법을 연구했다. 비릿한 선혈 속에 살과 뼈와 내장이 갈라지면, 60여 명의 작업부들은 뒤에 하찌마끼로 작은 낫을 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마치 과거의 원수를 갚는 것처럼 조마조마함이 있다. 뼈를 부수려면 큰 도끼와 톱을 가지고 높은 뼈 위에 올라 두 명이 걸어 끌어, 마치 목수처럼 조마조마함이 있다. 이것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일행들은 놀랐다.

▶거대한 고래가 잡히어 오다

“이제 고래가 옵니다”라고 소리치는 보―이의 소리에, 파도 높은 바다로 유쾌히 들어가려는 꿈은 깨어졌고, 아직 6시가 되기 전으로 어둡지만 날씨가 어제보다 더 거칠어졌다. 바람은 강하게 불고 눈이 내렸다.

 

기름의 등화(燈火)는 굉장한 빛을 내뿜고, 바람에 화분(火粉)이 날리고, 손에 손에 낫을 든 작업부들이 그 사이를 분주히 달리는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지옥의 연못에 빠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 마리만이 잡혀 막 배에서 육지로 인양했다.

 

처음 로프에 매달려 인양된 것은 51척 정도의 거대한 놈이었다. 곧바로 해부를 했다. 낫으로 고기를 절단해 로프에 걸어 놓고 뼈와 살과 내장을 일일이 분리했다. 선혈(鮮血)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분리돼 얻어진 고기는 곧바로 운반선에 싣고 뼈와 내장은 각각 처분했다.

 

▶장장(場長)은 포경장에 대해 말하다

장장 신타니(新谷)씨는 동양포경회사의 활동 상황을 말하면서, 대정 7년(1918)부터 포경을 시작해 매년 40~50두(頭)를 잡았고, 올해는 오늘까지 30두를 잡았는데 이 분량으로 올해는 많은 수확을 올린 것이라 한다.

 

올해 가장 큰 것은 65척이라고 하는데 한 마리 고래가 대체로 30~40톤의 중량으로 고기만 해도 적어도 한 마리에 1만 5000근(斤)이 나온다. 100근에 30~40원의 가격이 되니, 한 마리의 고래는 6000~7000원의 가격을 받게 되는 셈이다. 지금 포경장은 3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고, 포수는 서양인을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의 대청도는 양항(良港)

주위가 겨우 4리, 호수는 200호에 불과하지만 사립학교까지 두고 있다. 포경기(捕鯨期) 외에는 내지인(일본인)이 겨우 두 사람에 불과하다. 두 사람 중에는 명치 42년(1909)부터 이곳에 와서 이리코(イリコ)를 팔고 계신 다나베씨가 있다고 한다.

 

머나먼 섬 안에 훌륭한 항구가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양항이라는 것이다. 뒷산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바다는 깊어서 큰 배를 댈 수 있다. 항상 외로운 이 항구에도 매년 포경기 11월경에는 갑자기 120~130명의 내선인(內鮮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들어오고, 화장한 자들도 들어와 샤미센(三味線)의 소리도 듣게 돼 황해의 고도가 환락의 항구로 변화된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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