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소수 엘리트층에 의한 지배로 본 이탈리아의 정치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는 대중의 지배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다. 대중들은 그저 자신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엘리트를 기대할 뿐이기에 그 엘리트가 순환하면서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트의 순환론』(정헌주 역, 간디서원, 2018)에서 사자형(Lion)과 여우형(Fox) 엘리트가 교차한다고 했다. 사자형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강하고 충성심과 힘을 강조하며 용감하고 무모하며 때로는 무식하기까지 하다. 여우형은 현란한 말솜씨와 조작에 능하며 교활하고 주도면밀하며 때로는 유약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지도자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역대 대통령에 대입해보자. 먼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교활한 여우 성향이 있었지만, 권위주의가 넘쳤던 전형적인 사자형의 지도자였다. 4·19로 2공화국을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의원내각제로 무책임한 장면 총리가 지도자였다. 3번째 지도자는 18년의 철권통치를 했던 라이온형의 박정희였다. 그의 사후 80년의 봄 시절 최규하는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무능 그 자체의 폭스형이었다. 5번째 광주에서 피의 학살을 자행하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누가 뭐래도 사
2013년부터 8년이 지난 14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비로소 피의자 신분을 벗어났다. 그동안 간첩으로 오인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고 사회에서는 거의 격리되다시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생업을 위한 어떤 일이나 활동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서야 모든 오해를 털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나의 8년은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느닷없이 탈북자 간첩으로 몰려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유우성 씨 이야기이다. ‘유우성 간첩조작사건’으로 알려진 이 건은 2013년 기소되었지만, 이듬해 국정원이 중국 공안의 출입국 도장을 위조해 북한을 왕래했다는 문서를 조작한 것이 밝혀져 무죄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MBC의 사장이 되었던 최승호 피디가 해직 언론인 시절에 만든 영화 [자백]으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여동생 유가려 씨는 6개월 동안 국정원이 했던 몹쓸 짓으로 아직도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있다. 당연히 조작에 참여했던 국정원 직원들은 처벌을 받았지만, 함께 국가의 이름으로 그를 간첩으로 몰았던 검찰은 모두 불기소, 아주 경미한 내부징계로 종결되었다. 문제는 그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체제였던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은 불과 2-300여 년 전이었다. 민중(demos)과 지배(Kratos)의 합성어인 민주주의(민중의 지배, Democracy)가 18세기경에 다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부르주아 세력의 부각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던 군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지배자라는 의식은 매우 유용한 무기가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소위 시민혁명이 시작되면서 민주주의라는 오래전의 정치체제가 복권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절대 왕정을 거부하면서 등장했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서 국왕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과 권력의 중심이 의회로 넘어갔으며, 프랑스는 1789년의 대혁명을 통해 절대왕정을 무너트리고 비로소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인권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되었고, 미국은 1776년 독립혁명을 통해서 본격적인 민주주의의 정신을 구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의 민주주의의 가치인 인간에의 존엄과 자유, 평등, 정의, 박애, 인권, 관용 그리고 인류애까지 모두 오랜 시간에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한 맹공이 여야를 초월해서 연일 계속되고 있다. 성남시장 재직 시 추진되었던 대장동 개발 건은 추석 민심의 바로미터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보도량이 엄청났고 길거리에도 화천대유는 누구 것이냐는 등의 문구로 도배되어 있다. 이 지사의 입장에서는 크게 서운하겠지만 내년 대선의 지지율 1위 후보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공격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진실이야 곳 밝혀지겠지만 정치는 법이나 경제처럼 조문의 해석이나 수치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성 영역이기에 먼저 예단하고 시작하는 게임이다. 국민은 진실여부를 떠나 한 번의 판단으로 내린 결정은 잘 바꾸질 않는다. 야당과 언론 심지어는 여당 경쟁자까지 어느 것 하나 그에게 우호적인 배경은 없다. 그럼에도 진정성을 바탕으로 오해가 불식된다면 그렇게 형성된 신뢰는 더욱 오래가고 견고해진다. 그러므로 이번 협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이 지사의 향후 대선 가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어렵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임금을 꼽으라면 조선시대 정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서 돌아가실 때 11살이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다리 춤에 매달
조선의 3대 군주인 태종 이방원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인 이성계를 따라 북방의 많은 전투에 참여한 호방한 인물이었다. 그가 당연히 왕위가 자신에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 것도 아버지를 도운 공로 때문이었다. 여하튼 곡절 끝에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된 그는 여전히 그 시절의 무인 기질로 사냥을 즐겼다. 즉위 4년 차인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다. 왕의 행차이므로 대소 신료와 호위무사 등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리저리 사냥감을 찾던 그 순간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발견한 태종을 급히 말을 몰아 추적하였다. 한 손에는 활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말고삐를 잡은 형세는 영락없는 북방 무사 이방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꼬꾸라지면서 이방원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국왕 중심의 조선에서 왕의 변고는 국가의 변고였기에 주변의 모두가 달려와 왕의 안위를 챙겼다. 다행히 왕은 큰 탈이 없이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가 안심하는 순간 태종의 첫마디는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여라”였다. 평생을 전쟁터와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보냈던 태종이 익숙하게 타던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왕으로서 체면에 관한 문제였기에 그는 자신이 낙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홍범도 장군이 서거 78년 만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 그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멀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묻혀 계시던 전설적 인물인 홍 장군이 해방된 지 76년이 지나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되신 것이다. 아직 시신이 발굴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와 달리 그의 후반부 삶과 죽음을 알고 있기에 이제라도 모셔온 것에 만시지탄이지만 부끄러움을 면한 심정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 출신으로 군 나팔수 생활, 승려 생활과 포수시절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회자되어 왔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은 1895년의 단발령을 계기로 함경도 안변의 학포라는 곳에서 14인의 동료와 함께 하면서였다.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살던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한 홍범도 부대는 400명에서 많게는 1400명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일대의 최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가장 먼저 전국적인 항일조직을 결성한 곳은 연해주에 망명 중인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13도의군이었다. 이 조직에 홍범도 장군이 참모부 의원으로 선출된 것은 이전의 활동에 대한 양반가 출신 지도부의 인정이었을 것이다. 1910년대 홍 장군은 연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대선 출마 선언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앞으로 잘 준비해서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니 중차대한 후보가 앞으로 무엇을, 언제 공부하고, 습득해서 국정에 차질 없이 대비하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우리들의 언론은 칭찬과 미담 일색이다. 하긴 또 다른 야권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연일 설화에 올라도 지지도는 여전히 1위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들 야당의 유력 후보라는 인물들은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권의 공직자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언행에도 공통점이 있다. 노동시간이 일주일에 120시간 정도도 괜찮다는 발언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정식품도 선택할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이나, 집도 생필품이니 세금 낼 필요가 없다, 최저임금의 인상은 범죄행위라는 발언까지 한결같이 그 저변에는 국민은 언제나 시혜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의 발언에서는 속 깊은 계급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른 계급이므로 감히 올라올 생각을 말라는 우월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런 발언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이 사회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는 무지의 극치를 이루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노선을 두고 갈라졌던 항일단체들은 이념 면에 있어서만은 삼균주의라는 정치이데올로기로 통합되어 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주의 그리고 교육의 균등을 주장하는 삼균주의는 좌우의 독립운동단체들 대부분이 해방된 조국에 적용될 민족주의 정치이념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삼균주의를 만든 이는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으로 활동했던 우국지사 조소앙이었다. 그는 이미 임정의 헌법을 만들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으로 건국강령을 작성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 백범과 함께 귀국한 조소앙은 분단정권이 아닌 통일민주정부수립에 나셨다, 반탁운동과 죄우합작운동 등 그는 시종일관 임정을 대표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은 분단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민족운동의 몸부림이었다.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에는 임정세력과 함께 당시 가장 나이 어린 조만제(서울 상대 3년)가 삼균주의학생동맹 위원장으로 참석했다. 조만제는 조소앙에게 감명해 그의 삼균주의 노선을 따른 열혈 청년이었다. 남북협상팀은 나름의 성과를 가지고 귀환했지만 이미 냉전적 세계질서가 형성된 뒤라 허망한 결과를 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북협상이 강조되는 것은 아무리 엄혹한
사법부가 정의를 실현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아무리 사회가 썩어도 그래도 최후의 보루로서 사법부가 살아 있다면 그 사회의 건강성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비난하면서도 그래도 초대 사법부 수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의 행적을 기억하고 또 죽산 조봉암에게 양심적 판결을 내렸던 유병진 판사와 법복을 입은 성자였던 김홍섭 판사를 떠올리며 “그래도 그 시절 믿을 곳은 있었어”하는 위안을 삼는 것처럼 말이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존경받는 판사의 계보는 누가 잇고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면 마지막으로 하소연할 곳이 사법부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사법부는 국민의 기대보다는 권력에 기대고 최근 들어서는 돈의 위력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급기야 지난 7일에는 소송한 지 6년 만에 열린 재판에서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나왔다. 이미 두 차례나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피해를 인정받은 일제의 징용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했는데 판결 논리가 가관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국제사회는 불법으로 보지 않는다”, “강제동원의 불법성은 국
1800년 5월 그믐에 정조는 교시를 발표했다. 오회연교(五晦筵敎)였다. 앞으로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하겠다는 정조의 야심에 찬 선언이었다. 재위 26년 만의 결단이었다. 즉위 초 조정은 결코 그에게 호락치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노론세력은 아버지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정조에 우호적인 남인과 소론은 미약했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 정조는 스스로 부하를 만들어 써야 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초계문신(抄啟文臣)이었다. 과거 급제한 자들 중 당파색이 옅은 젊은 인재를 선발해 규장각에서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킨 후 관직에 나가게 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정조는 조선 후기의 찬란한 진경문화시대를 열었다. 중국 일색의 문화를 조선중심으로 바꾸었으며 실생활에 적합한 실용적인 정책들을 개발해 위민정치를 실시하였다. 사병화되고 있던 오군영을 대신한 장용영이라는 조선 최강의 군대를 육성해 자주국방의 초석을 놓았으며, 신해통공을 반포하여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고, 수원 화성을 건립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득권 세력이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수도 한양을 천도할 구상까지 했었다. 심지어 그는 즉위하자마자 노비추세관을 폐쇄하는 등 장차 노비해방까지도 구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