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정동영 후보는 기자 출신의 ‘대중친화형’ 정치인이다.
모진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을 끌어온 ‘초인형·투사형’ 리더십과는 달리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여론의 흐름을 읽어내고 이를 과단성있게 현실정치에 투영해내는 여론중시형 리더십으로 평가된다.
1996년 MBC 기자직을 그만두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최연소 최고위원, 열린우리당 의장, 통일부 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 승승장구했고 정치입문 12년만에 범여권 최대정파의 대선후보가 되는 영예까지 안았다.
◆휴전일 출생...‘눈물 젖은 밥’ = ‘귀공자’와 같은 화려한 이미지와는 달리 정 후보는 시련과 굴곡으로 점철된 유년시절을 보냈다. 6.25 전쟁 휴전협정일인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통에 네명의 형이 병사하면서 장남으로 성장했다. 특히 전주고 2학년 재학시절 도의원을 지낸 부친이 갑자기 별세하자 정 후보는 홀어머니와 세명의 동생을 보살피는 가장의 역할을 떠안게 됐다.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정 후보는 암담한 시대상황을 견디지 못해 1973년 최초의 유신반대 집회인 서울대 문리대 데모에 참가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듬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3개월간이나 복역한 뒤 출감했고 곧바로 군에 강제징집됐다. 권만학 경희대 교수 등 당시 교류했던 친구들은 그의 정치활동에 중요한 자산으로 남았다.
정 후보가 가장 고달팠다고 회고하는 시기가 군 제대후 복학시절이다. 정 후보는 서울 변두리에서 아동복을 만들어 납품하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옷장사를 했다. 고난의 시기였지만 부인 민혜경씨의 대학 기숙사를 찾아가 개나리 한다발을 들고 청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 대학을 졸업한 정 후보는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78년 MBC 보도국에 입사한 그는1996년까지 18년간 기자생활을 지내며 격동의 현대사를 현장에서 체험했다. 기자시절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언론관은 유명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내로 걸어 들어가 빗발치는 총성을 들으며 도청 앞에서 취재를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정 후보가 작성한 뉴스 리포트는 보도되지 못했다가 27년만인 올해 5월 우연히 원본이 발견돼 소개된 바 있다.
1996년 4월 MBC 9시뉴스 간판 앵커 시절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 정치계에 입문한 정 후보는 전주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정치 인생의 첫걸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헌정사상 최초로 2회 연속 전국 최다득표의 영광을 안았고 총선 직후에는 40대 기수론의 돌풍을 일으키며 47세의 나이로 집권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정풍운동과 2002년 ‘경선 지킴이’ = 2000년 12월 권노갑 당시 민주당 고문의 2선 퇴진과 당 쇄신론을 골자로 하는 정풍운동은 정 후보가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는 도약대로 작용했다. 정 후보는 당시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도중 김대중 대통령의 면전에서 “국민의 눈엔 권노갑 최고위원이 YS 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며 권 고문의 2선 퇴진을 요구, 정풍운동의 불을 지폈다.
◆‘몽골 기병론’으로 총선 압승 = 대선 이후 정 후보는 민주당내 개혁그룹을 이끌고 신당 창당을 추진, 2003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열린우리당을 출범시켰다. 전당대회에서 초대 당의장에 당선된 정 후보는 새벽부터 재래시장과 택시기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현장 속으로 파고드는 ‘몽골 기병식’의 역동적 리더십을 발휘했고 이에 힘입어 당 지지율은 불과 두달만에 30%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47석의 초미니 여당에 불과했던 열린우리당이 탄핵정국과 17대 총선을 거쳐 과반이 넘는 152석의 거여로 발돋움하면서 정 후보는 명실상부한 여권 유력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정 후보는 2004년 6월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며 ‘대권 수업’을 시작한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의 6.17 단독 면담, 북핵위기를 해결한 9.19 공동성명 타결, 이산가족 화상상봉 시대 개막은 정 후보의 통일부 장관 재직 시절 이룬 대표적 성과다. 특히 개성공단 건설은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지방선거 참패와 탈당, 대권 재도전 = ‘라이벌’ 김근태 의원과의 치열한 당내 경선 끝에 당 의장으로 ‘컴백’한 정 후보는 5.31 지방선거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봤다. 지방선거 참패 후 당의장직을 사임하고 독일로 떠난 정 후보는 ‘평화’와 ‘경제’를 키워드로 한 신중도 노선을 들고 귀국해 대권 도전에 대비한 정책 콘텐츠 준비에 들어갔고 이는 추후 대선국면에서 정 후보의 트레이트 마크인 ‘평화경제론’을 만드는 초석이 됐다는 후문이다.
민심대탐방과 평화대장정을 통해 권토중래의 기회를 엿보던 정 후보는 2007년 6월18일 ‘대통합의 마중물’을 천명하며 열린우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앞서 정 후보는 4월말 노무현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동지적 관계를 사실상 ‘청산’하고 비노 진영의 선봉에 섰다.
7월3일 대선출마를 선언한 정 후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이은 제3기 ‘통합정부’를 향한 길고도 험한 여정을 시작했고 두달여만에 1차 고비인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