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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 심영철 수원대 미술대학 조형예술학부 교수

미국서 체험한 네온간판서 라이트 아트 영감얻어
예술·환경·기술·상업 연계해 창조적 발상 도전
역동적 움직임·음악적 요소가 작품속에 자리잡아
물·소금·동전·비디오 등 소재 다양화 소통 이끌어

과학과 예술 호기심 작품화 다양한 퍼포먼스 관객 유혹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순박함.

어찌보면 이 단어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최근 만난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예술학부 심영철 교수에게는 예술에 대한 깊은 열정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소녀같은 순박함이 였보였다.

심영철 교수는 복합채널(Multi channel)을 통해 소통을 극대화하는 작가이다. 그동안 그가 작품에 사용했던 것들은 물, 불, 흙, 나무, 돌, 모래, 소금, 풀 등의 자연적인 요소와 철, 스테인리스스틸, 유리, FRP 등 광물질이나 상업적인 비디오, 홀로그램, 광섬유, 네온 등 첨단적인 것과 함께 항아리, 촛불, 동전 등 오브제적인 것들이다.

이렇듯 그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모든 매체를 통해 다감감(시각, 청각, 촉각, 후각)을 복수 예술적 조각, 입체 설치, 릴리프, 화화, 퍼포먼스적인 토탈 환경을 창조해 내고 있다.

더욱이 전시마다 다양한 퍼포먼스로 먼저 관객들에게 다가서는 등 예술에 대한 다양성을 사람들이 고루 알게끔 동화해 나가는 것이 그만의 매력이다.

심영철 교수는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어머니 역시 평생을 자식교육에 매진했다.

예술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적극적인 의지 덕분에 유년시절부터 심영철 교수를 비롯한 오남매는 음악, 미술, 무용을 비롯한 예술적 교육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서와 자식에 대한 헌신이 삶의 전부였던 어머니의 성향은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에게 온전히 이어졌다.

 

“네 살 때부터 음악에 맞춰 자연스레 춤을 출 정도로 무용에 호기심이 많아 한국무용과 발레를 배우게 됐죠. 중학교 때는 전국무용콩쿠르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아버지는 제가 무용가가 되기를 바라셨죠.”

심영철 교수의 퍼포먼스에는 이러한 성장배경이 깔려있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음악적인 요소가 그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모든 예술 영역을 아우르는 호기심과 교육적 바탕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5년 성신여대에 입학한 심영철은 당시 미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정관모 교수의 작업 모습을 보고 조각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됐다.

“정관모 교수 작업실에서의 첫 번째 과제가 ‘돌덩어리처럼 굳은 흙을 부숴라’, ‘석고가 지저분하게 붙은 주전자를 깨끗이 닦아서 물을 끓여라’, ‘나무의 껍질을 벗겨라’ 였죠. 이는 곧 동경이 아닌 진지한 열망, 즉 기본적인 재료와 작업과정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부터 조각을 시작하라는 가르침의 과제였습니다”

이후 1983년에 열린 심영철의 ‘빗의 단계적 표상’이라는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게된다.

“여인의 단장 도구였던 빗을 소재로 여성성과 사물에 대한 탐색을 시도함으로써 물질의 이면에 잠재해있는 정신적 요소를 작품 속에서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것은 저의 생애가 곧 자신의 작품이며, 개인전 주제들 속에는 자신의 삶과 정서가 녹아있음을 뜻하고 있죠.”

이어 심영철 교수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그 직후인 84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로스엔젤레스의 ‘Otis-Parsons’에서 코스워크를 수강하고 동시에 ‘Golden State University’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자신의 조각적 환경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유학시절 동안 그는 홀로그램, 비디오, 설치, 라이트 아트, 키네틱 아트 등 새로운 매체와 장르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특히 ‘덩어리’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충실하도록 조각교육을 받아온 저에게 새로운 환경과 과학의 진보는 매체에 대한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자극했죠. 그리고 그 호기심은 새로운 매체에 대한 실험을 부단히 지속시킴으로써 과학의 산물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심영철 교수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체험한 현란한 네온 간판들은 그의 라이트 아트의 영감이 되었고, 컴퓨터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작품으로 구상하기도 했다. 우연히 서점에서 접한 백남준에 관한 기사에서 그가 모니터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설치 조각가로서의 그의 행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심영철 교수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89년에 개최한 개인전 ‘Jesus Love You’(갤러리 동숭아트센터)와 그 이후의 전시들은 다양한 매체에 대한 모색을 통한 그의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당시 그의 작품을 전통적인 조각이나 예술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시선들도 존재했지만 자신이 가진 본능적인 호기심과 예술에 대한 열린 인식에 누구보다도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의 예술적인 영역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심영철 교수는 늘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아 스스로가 학생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은 예술과 경영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창의성’에 대한 열린 시각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의 경영마인드와 예술가의 작가정신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거든요. 그 동안 기술이 세계를 이끄는 힘이었다면, 이제는 ‘예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가들이 세계를 주도하기 위해 필요한 창의성이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믿음 아래서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과 환경, 예술과 기술, 예술과 상업을 연계시키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처럼 심영철 교수는 창조적인 발상을 위한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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