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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난다 <4>

세계문화유산 등재 우선 추진대상 선정

 

4. 남한산성 행궁과 단묘(壇廟)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과 달리 유사시에 피난해 적과 대치할수 있는 산성의 시설과 광주유수부의 관청시설, 그리고 왕이 머물수 있는 행궁시설이 공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이중 유사시에 왕이 머물기 위한 행궁에 관련된 시설과 각종 제사시설 누정(누각(樓閣)과 정자(亭子)의 줄인 말. 멀리 볼 수 있으며 편히쉴 수 있는 곳)에 대해 조선시대에서 현재까지 각 시설물의 위치와 범위에 대해 알아보자.

 

 

 

 

 

 

◇남한산성 내 행궁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주장성을 쌓은 이래 군사적인 요충지로 주목 받아온 곳 이다.

조선 인조 2년(1644) 이괄의 난을 겪고 나서 조정에서 도성 가까이 보장(堡障·성 밖에다 임시로 지은 소규모의 요새) 지역을 둬야 한다는 의논이 있어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연평군 이귀가 주도하여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그 이듬해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로서 성내에 행궁을 건립했다.

인조 4년(1626)성곽과 행궁이 준공되자 성의 북쪽에 있었던 광주부의 읍치를 성내로 옮겼다. 행궁의 상궐과 하궐은 내행전, 외행전 이라고도 부른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피난했고 숙종이후 왕이 행차할 때 이용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경우 주로 유수의 사무공간으로 사용했다.

남한산성에서는 읍치로서의 중요시설인 객사가 있는데 행궁의 남동쪽에 남향으로 있었다. 정전의 중앙 감실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삭망이면 뜰에서 망배례를 행했다.

인조 2년(1624) 목사 유림이 세웠고 목사 이태연이 편액을 걸면서 인화라 하였으며 순종 29년(1829)유수 이지연이 보수했다.

도성이라면 궁궐에 해당하는 궁 좌측으로 도성의 종묘처럼 유사시 종묘의 신주를 가져와 봉안할 수 있는 좌전을 두고, 행궁의 우측에는 국가사직의 위패를 봉안할수 있는 우실을 두었다. 병자호란때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에는 종묘와 사직의 신위는 빈궁, 원손과 함께 강화로 피난했으므로 남한산성에 가지고 오지 못했다.

이와 같은 전례를 감안해 유사시의 피난장소로 강화도에는 숙종21년(1695)에 장녕전을 건립하여 묘사 봉안 기능을 뒀다.

 

 

 

 

 

 

남한산성에 묘사봉안 시설을 둔 것은 강화도 보다 늦은 숙종 36년(1710)이었다. 남한산성에 본래 묘사가 없어서 봉안할 만한 실이 없으니 수어사에게 명해 창건하게 하돼 평소의 제도와 같게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시설에 대한 마땅하 명칭이 없어서 논의하던 중, 별전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예조참판 김진규가 왼쪽에 묘가 있고 오른쪽에 사가 있는것이 예인데 좌·우 두 글자를 넣어 은연중 예의 본의를 따르면서도 드러나게 묘·사를 말하지 않은 채 전과 실로 바꾸어 종묘를 권안할 곳은 좌전이라 하고 사직을 권할곳은 우실이라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우실은 사직을 봉안하는 곳으로 각 고을마다 있는 사직인 광주읍 읍치의 사직단과는 다르므로 이를 구분해야 하고 단을 갖추지 않고 위판을 권안할 신실이 있을 뿐이므로 사직단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비록 생소하기는 하나 달리 마땅한 칭호가 없으므로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숙종대에 좌전과 우실을 건립한 후에 이곳은 비워두고 잘 잠가두게 했다. 즉 이곳은 항상 신위를 두는 것이 아닌 비상시 이곳으로 국가의 사직과 종묘의 위판을 옮겨 왔을 때를 위한 것이었다.

19세기에 편찬한 읍지류에는 우실이 행궁 밖 남문 안쪽에 있다고만 했으며 남한산성을 그린 지도에는 북향의 건물이 행궁을 향하여 그려져 있다.

광주부읍지에 우실의 규모는 4칸으로 비상시에 각 실에 국사신, 국직신, 후토신의 위판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궐 삼문 밖 외조영역에는 교련관청이 있어서 행궁 내에 부속 관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련관청은 관해 기관의 하나로서 행궁의 진입부 근처에 있었다.

 

 

 

 

◇남한산성 내 단묘(壇廟·제사를 지내는 곳)

남한산성 내에는 지방읍치에 설치되는 각종 단과 두 군데의 사묘가 있다. 보통 지방읍치의 단은 읍성밖에 위치하게 되는데 남한산성은 예외적인 사례다.

각 지방마다 뒀던 사직단은 원래 남한산성으로 읍치를 옮기기전에 초덕리에 있었는데 영조11년(1735) 부윤 조명교가 옮겨온 곳이다.

중정 남한지에는 왼쪽의 사와 오른쪽의 직 두단인데 주위를 담장으로 둘렀으며 세 개의 문과 각이 있다고 했다. 현재는 남단사지 오른쪽에 돌로 쌓았던 장방형 단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황단과 여단은 북문 안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성황단에는 여단에 질병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여제를 드리기 사흘 전에 먼저 고제를 행하고 여제때에 다시 제를 지냈다.

여단에는 일년에 세 번 청명일과 7월 15일과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다. 그 외 청량산 기우제단이 있는데 서정대에 있다.

사묘로는 남한산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전해지는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숭렬전과 현절사가 있다.

숭렬전은 온왕묘라고도 하는데 행궁의 북쪽에 동향으로 있고, 인조 16년(1638)에 세웠으며, 온조왕과 남한산성 축조에 큰 역할을 한 완풍군이 이서를 배향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성안의 동쪽부분에 서향을 하고 있다. 숙종 14년(1688)에 세웠으며 숙종 25년(1699)에 김상헌과 정온을 추가로 배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