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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3. 수원 3.1운동

“대한독립 만세!”숭고한 그날의 외침 잠든 조국愛 깨우다

수원 3·1운동(三一運動).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군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으로 브리태니커사전이 소개하고 있는 수원 3·1운동은 민족대표 48인인 김세환 등의 지식인과

젊은 학생 수백명이 화홍문 방화수류정 부근에 모여 시작한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서울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수십만의 군중이 대한독립을 외친 서울의 3·1운동과 함께 조선독립의 첫 시작을 알린 수원 3·1운동은 이후 약 2개월간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유학자, 농민, 학생과 기생까지 수원의 전계층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그 자체였다.
 

 

 


그렇게 시작된 수원 3·1운동은 이후 16일 수원면 장날에 서장대와 연무대에 수백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고, 21일과 23일에는 동탄면 오산리와 수원역, 서호 부근에서 계속되면서 고조됐다.

3월 28일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1천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과 함께 순사 1명을 처단했고, 29일에는 김향화의 주도 아래 기생 30여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야간에는 상인과 노동자 등이 합세해 곳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또 오산장터에서도 8백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우편소와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파괴했고, 양감면과 태장면에서는 산상 횃불 시위를 벌였다.

연일 끊임없이 지속된 만세운동은 4월3일 일제의 행정기관인 우정면·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경찰관주재소를 불태우는 등 격렬하게 진행됐고, 발안, 비봉, 마도 등 수원 전역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4월 15일 발안 장날 다시 수백여명이 만세운동을 펼치는 사이 일제는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 제암리 교회에 무고한 주민 30여명을 가둬놓고 불을 질러 많은 희생자들을 낸 야만적 학살까지 자행하기도 했다.

수원지역 모든 시민이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했던 수원 3·1운동은 수많은 수원 사람들의 조국사랑과 희생이 있었다.

 

그중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김세환 선생은 수원 종로교회에서 기독교와 교육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이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 수원으로 돌아온 김세환은 상업강습소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수원상업회의소 산하 상업강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삼일여학 학감으로 근무하던 중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3·1운동 조직책임자로 활동했고, 서울 도착이 늦어져 독립선언서에 기명은 하지 못했으나 수원 3·1운동을 주도해 3월 12일 체포됐다.

1920년 10월에 석방된 김세환은 1928년 신간회 수원지회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평생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 독립의 영광을 지켜본 김세환 선생은 한달여 뒤인 9월 16일 수원의 자택에서 운명했다.

“석방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던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열사. 1920년 구국민단의 구제부장을 맡은 이선경 열사는 일제에 체포돼 지독한 고문에도 “태어났을 때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졌고, 정의의 길이라 생각해 석방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고 외쳤다.

1921년 4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아 복역한 이선경 열사는 이후 구류 8개월만에 석방됐으나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집으로 옮겨지자마자 1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조국사랑에 남녀노소와 신분이 있을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준 이들도 많았다. 바로 수원기생만세운동의 김향화와 30여명의 기생들이다. 1919년 3월 29일 총칼로 무장한 일제경찰과 수비대가 지키고 선 수원경찰서 앞 자혜의원 입구에서 수원 기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당시 23살의 김향화는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향화는 지난 201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에 비분강개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수원 팔탄으로 돌아와 문맹퇴치운동에 나섰고, 이후 63세가 되던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1천여명이 넘는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 일본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둔 이정근 의사.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수원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해 일제 식민지배에 앞장선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며 맞섰던 대표적 항쟁지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만행인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김흥렬 선생과 1936년 조국독립을 기원하다 눈감은 백낙렬 선생. 그리고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

 

반만 년이나 이어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해 천하의 무엇이든지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라던 숭고한 외침은 마침내 조선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발전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도 함께 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헌신한 수원 3·1운동은 현재 제각각의 이해관계속에 고착화된 수원·오산·화성의 각기 다른 자기들만의 행사로 분리된게 아니냐는 우려를 받는다.

백여년전 식민지로 전락했던 이땅에서 최초로 ‘조선독립’을 외쳤던 수원사람들의 조국사랑을 다시 하나로 모아 그 소중한 뜻을 기리고 면면히 이어나가는 수원 3·1운동의 복원과 계승, 그게 바로 지금 수원 3·1운동의 참뜻인지도 모른다. /자료제공:수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