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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6. 노작(露雀) 홍사용 시인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일제 식민 치하, 나라가 있음에도

내 나라가 아니었고

왕이 있음에도 백성들은 신음했다.

외세의 폭압에 이땅의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스러져가던 시절

역사를 관통한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계승해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노래하며

고고한 민족혼을 일깨우던 시인.

수원하면 떠올리는 정조대왕과 함께

사람들이 꼽는 수원출신의 또 하나의 왕.

‘눈물의 왕’ 노작(露雀) 홍사용.

그 절절한 노래들이 다시 돌아온

3월의 하늘에 울려 퍼진다.

 

 

1900년 수원과 용인이 길 하나를 두고 맞닿은 곳에서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부위를 지낸 홍철유의 외아들로 태어난 불세출의 민족시인 홍사용. 생후 100일 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부친을 따라 서울 재동으로 옮겨 자랐으나, 9세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다시 수원으로 이사했다.

이후 부친이 그를 위해 만든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이후 그의 평생 시세계를 가른 원동력이 되었다.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한후 동창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과 함께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홍사용은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다. 이후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고향 수원에 은신하면서 정백과 함께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합동수필 ‘청산백운’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다.

이후 홍사용은 문화사를 설립, 우리나라 낭만주의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면서 문단활동을 본격화해 ‘개벽’, ‘동명’, ‘여시’, ‘삼천리’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해 조선의 또 하나의 독립선언을 담아 민족혼에 기름을 부은 ‘나는 왕(王)이로소이다’와 ‘묘장’,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각시풀’, ‘붉은 시름’ 등의 수십편의 시와 소설 ‘저승길’, ‘뺑덕이네’, ‘봉화가 켜질 때’, 희곡 ‘할미꽃’, ‘제석’ 외에도 주옥같은 수필 및 평문을 쏟아냈다.

홍사용은 3·1운동의 실패에서 온 절망감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 조국’과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 등의 감상적 색채를 특징으로 숱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이란 평가다.

또 당시 우리 문단에 횡행했던 문학의 맹목적인 서구화와는 달리 전통적인 맥락에서 시를 창작하고 민족적인 이념을 시를 통해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조’ 동인의 시적인 경향에 비춰 감상적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혹은 현실을 떠난 주관적인 정열과 몽환적인 세계의 감상적인 경향으로 그의 문학이 치부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그와 ‘백조’ 동인으로 활동한 박종화, 현진건, 박영회 등이 다양한 평가속에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그는 잊혀지곤 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홍사용은 1923년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당시의 희곡들이 관념적인 주제에 남녀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을 다룬 것에 비해 그의 작품이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 것은 한국 희곡사에 선도적인 것이었다. 홍사용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정한을 표출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토월회는 운영이 매우 어려웠는데 재정이 탄탄했던 홍사용은 신극운동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일깨우겠다는 의지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양가에서 물려받은 천석지기와 생부의 사백석지기 전답을 문예지 발간과 신극운동, 임시정부에의 지원 등으로 불과 몇년만에 탕진하고 끝내는 병까지 얻는다.

재주가 너무 많아서일까.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의 다양한 글쓰기에 신극운동에 연출까지 다방면에 민족혼을 담아 팔방미인으로 재능을 뽐낸 게 그에 대한 저평가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30세 무렵엔 기거할 집도 없어 동료 박진의 집에 머물기도 한 홍사용은 이때부터 각혈을 하는 등 건강에 어려움을 겪다가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하기도 했고, 이후 서울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 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 버린 홍사용은 이 일로 일제에 의해 주거 제한 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강경과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1944년에는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1947년 1월 5일 지병인 폐환으로 눈을 감았다.

수많은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살아 생전 단 한편의 시집도 내지 못한 홍사용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 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고 장남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홍사용은 항일 시인으로 분류되는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을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 후반에 대부분이라 할 만큼 많은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남긴 것과 달리 이 시기에도 친일시를 창작하거나 친일 활동을 하지 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죽는 날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친일의 글 한줄도 남기지 않은 대쪽같은 선비의 삶을 살다간 노작 홍사용. 93주년 3·1운동이 다시 다가온 요즘, 그가 살다간 수원과 화성, 오산은 행정구역 통합에 대한 엇갈린 의견들로 뜨겁다.

살아 생전 수원사람으로 불린 홍사용은 언제부턴가 수원사람도 되고 화성사람도 되버린 아이러니한 현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부정해도 역사는 속이거나 거스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앞에 이제 ‘평생을 수원사람, 조선사람’으로 살다간 ‘민족시인 홍사용’의 이름과 정신을 다시금 기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