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모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하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 김명은 시인
/ 김태정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시선 2004년)
서울 토박이 김태정 시인은 2004년『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첫 시집을 내고 서울을 떠났다. 홀로 해남 땅 끝으로 내려갈 때에도 호마이카상을 버리지 않았다. 그 상을 갈아엎겠다는 것이 자존심 때문이라지만 그보다 자신의 궁핍과 생각을 다 들켜버린 초라함과 쓸쓸함이 무서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암 덩어리를 품고 대적한 죽음은 아니었을까. 2011년 9월 타계할 때까지 서로의 궁핍을 읽어주었을 가족같은 호마이카상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까지 지켜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