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3 (월)

  • 흐림동두천 23.5℃
  • 흐림강릉 30.0℃
  • 서울 24.7℃
  • 대전 24.5℃
  • 대구 28.9℃
  • 흐림울산 27.3℃
  • 광주 26.0℃
  • 부산 23.5℃
  • 흐림고창 25.6℃
  • 흐림제주 29.7℃
  • 흐림강화 22.9℃
  • 흐림보은 24.4℃
  • 흐림금산 25.4℃
  • 흐림강진군 26.3℃
  • 흐림경주시 28.5℃
  • 흐림거제 24.1℃
기상청 제공

인재 넘쳤던 시대, 무정부적 상태인 까닭은

동서 갈등 현장 주목된 인물 ‘선조’
정여립의 난… 독재 권력구축 성공
이이·박순·류성룡·노수신 등 등장

 

선조 5, 6년. 삼사의 청직에서 최고 요직까지 모두 사림이 차지했는데도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않자 이이는 당황하고 고민했다. 그 결과가 선조 7년 1월에 나온 ‘만언봉사’였다.

“정치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도 성과가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기’된 군자가 집권을 하면 ‘치인’이 된다는 믿음, 성군과 현신이 만나면 좋은 정치가 이뤄진다는 믿음이 선조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의도가 좋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즉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의도가 아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2010년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을 펴낸 이후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질문을 줄곧 받은 이정철 박사는 이 물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한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는 동과 서의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가장 주목되는 인물로 선조를 주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조는 양 진영이 극단으로 치솟는 갈등의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자가 됐다. 특히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돼 수많은 희생자를 냈던 기축옥사 과정에서 선조는 거의 완전하게 조정을 장악하고 관료들에게 거의 제한받지 않은 독재에 가까운 권력 구축에 성공했다.

선조는 서인과 동인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이쪽저쪽으로 옮겨가며 명망 있는 인물을 정치적으로 소비했다. 이이, 박순, 이산해, 류성룡, 정철, 성혼, 이원익, 노수신 등이다. 그들은 정치적 용도가 다했다고 판단되면 버려졌다.

이이는 그렇게 되기 전에 갑자기 사망했지만, 더 오래 살았어도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선조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철에게 위관을 맡도록 강제했다. 이것이 가져올 당파적 갈등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최대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다.

그는 왕이라는 제도가 자신에게 제공한 것을 최대한 이용했고 또 누렸다. 하지만 그것을 토대로 가능한 공적 이상(理想)의 정책적 구현에 무관심했다. 선조는 정치 상황 및 그 결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선조를 통해 정치적 힘과 정치적 책임은 분리되었고, 자연스럽게도 그것은 국정의 무정부적 상태를 초래했다.

이정철 저자는 이같은 흐름에 대해 올바른 정치적 대의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당쟁은 큰 차이를 낳는다고 밝히며 “당연히 정치적 욕망을 가장 큰 동력으로 움직였지만 중요한 것은 대의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대의의 중요성을 책을 통해 역설한다.

/민경화기자 mkh@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