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제세동기’나 ‘싱크 홀’, ‘블라인드 채용’, ‘포괄수가제’처럼 국민의 안전과 보건, 나아가 생명과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말이 알아듣기 어려울 때 국민은 위험에 노출되고, 알 권리를 침해당하고 외국어와 한자 능력에 따라 차별당할 위험에 처한다.
또한 어려운 말은 정책과 사업 내용을 알리는 데에도 장벽으로 작용, 일의 효율을 떨어뜨린다.
뿐만 아니라 ‘홈리스, 실버’처럼 불편한 것을 감추고 차별을 덮거나 ‘사물 존대’처럼 갑질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한글문화연대 대표인 이건범은 서울 시내버스 로마자(BGRY) 표기 없애기, 정부 공문서 쉽게 쓰기,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막기, 식품 포장의 한글 우선 표시 지키기 등 국어시민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18년간 우리나라 국어운동의 중심에서 싸워온 그는 ‘언어는 인권이다’를 펴내 지금 우리 시대에 언어(말)를 어떤 시각과 태도로 보고 써야 할지 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는 언어 혹은 국어 문제라고 하면 늘 표준어와 맞춤법, 고운 말 위주로 생각하던 통념에서 벗어나 언어의 다양한 얼굴을 생명, 존엄, 권리, 효율, 평등, 공생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비춘다.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서서 국민의 권리, 즉 인권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언어를 바라보는 것이다.
언어를 인권으로 보는 저자의 생각은 언어와 정치, 언어와 민주주의의 관계로 이어진다.
국민의 삶을 규정하는 정치에 국민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치판과 공론장의 언어가 쉽고 예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민주공화국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대우하는 ‘시민적 예의’를 갖춘 말이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시민의 정치 참여를 북돋워 민주주의의 수준을 높이고 시민의 덕성을 키운다.
쉽고 바르고 품격 있는 국어는 민주주의 발전에도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어를 지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또한 우리 국민의 국어 사랑이 식어버린 데에는 역사적 사정이 있다고 밝힌다.
우리 국어가 핍박을 받았던 일제강점기부터 독재정권을 거쳐 외환위기를 겪으며 변화를 겪어온 우리말의 흐름을 재미있으면서 날카롭고도 통찰력 있게 정리한다.
특히 우리 국민이 국어 문제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같은 삶의 맥락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이유를 우리나라 근현대기에 있었던 국가 주도의 국어정비과정의 부정적 효과라고 주장한다.
또한 1987년 민주화 이후에 ‘내 마음대로 말하면 어떠냐’는 자유화 분위기가 퍼지면서 외국어 남용과 말의 파괴가 증가했고, 이 풍조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강자의 말, 즉 외국어와 거친 말을 남용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책은 우리 국어가 겪어온 약 100년의 역사적 과정을 간명하고도 재미있게 담고 있으며 국어가 걸어온 길의 연장선에서 앞으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쉽고 명쾌하게 풀어나간다.
/민경화기자 m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