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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의 계절 갈비 한 점, 이야기 두 점

 

 

 

갈비의 고장서 맛보는 경기도 식도락 이야기

어느덧 하늘은 깊어지고 노오란 가을 햇빛도 가득하다. 산들바람도 한층 더 시원해지면서 가을여행도 깊어짐을 전한다. 여행지의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여행의 그 풍미를 더한다. 하지만 가을여행 이야기도 배가 고프면 잘 들리지 않는 법. 그래서 이번 가을, 경기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식도락 이야기를 전한다. 부드러운 식감이 가득한 갈비를 한점 뜯으며 이야기를 들어보자.



 

 

 

 

 

달콤한 양념에 참나무 숯의 풍미가 더해진 포천 이동갈비

돼지갈비집에 소갈비 부탁한 노모
장병 챙겨준 주인의 마음 ‘입소문’
포천 이동막걸리도 유명세


포천 이동면의 갈비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향토음식으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산정호수, 백운계곡, 국망봉 등을 찾은 관광객들, 입대한 아들이나 친구, 연인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특히 입대하면 배곯고 고생하는게 당연했던 시절이었기에 면회나온 아들과 제일 먼저 찾는 곳은 근처의 돼지갈비집이었다.

1970년대 어느 날, 돼지갈비집을 찾던 할머니는 다음 날 자신의 아들과 함께 오겠다며 품 안의 소갈비를 꺼내 양념값에 품삯까지 쳐 주겠다며 구워줄 것을 부탁했다. 꼬박 하루 걸려 먼 길을 온 할머니는 막내 아들에게 꼭 소갈비를 먹이고 싶었던 것.

고향에서 비싼 갈비를 사 품에 안고 왔지만 날이 더워 고기는 이미 쉬어버렸다.

자식 키우는 그 마음을 알고 있던 돼지갈비집 주인은 말없이 쉰 고기를 받았고, 이튿날 새벽 시내 도축장에서 제일 좋은 소고기를 사 부랴부랴 재워 노모와 장병을 먹였다.

돼지갈비집 주인의 마음에 감동받은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주인은 소갈비 메뉴를 시작하게 됐다.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소갈비가 이동 갈비를 대표하는 음식이 됐다고.

1980년대 등산객들에 의해 유명해진 포천이동갈비는 과일로 재워 달콤한 양념맛과 참나무 숯불의 향기가 더해져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함께 내어놓은 막걸리도 산세 좋고 깨끗한 백운산 맑은 물로 제조해 뒤끝이 깨끗하고 시원해 유명세를 탔다.

조선시대 임금께 진상하던 술을 빚던 양조장 터에서 제조한 이동막걸리 역시 포천의 특산품이다.
 

 

 

 

 

며느리의 효성, 동두천 떡갈비

전쟁통 동두천에 시집 온 전주댁
이가 안 좋은 시어머니 위해
전주 떡갈비에 새로운 방법 접목


‘갈비’하면 동두천 떡갈비도 빼놓을 수 없다.

동두천 떡갈비의 역사는 6.25 전쟁 이후 전주 태생의 강씨 소녀가 동두천에 시집을 오면서 시작됐다.

이미 650여년 전부터 떡갈비를 즐겼던 전주의 전통음식이 동두천으로 ‘시집’온 것이다.

전주댁은 전주식 떡갈비 만드는 방법에서 한층 더 새로운 방법을 접목시켰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전쟁통에 피난 온 사람이었는데, 이가 좋지 않아 죽 등을 먹었다.

그런 시어머니가 딱했던 전주댁은 어릴 적 친정어머니가 입안에 쏙 밀어 넣어주던 고운 떡갈비를 기억하고 갈비에서 발라낸 다진 살을 곱게 빚어 구워 시어머니께 올렸다.

그 정성과 맛에 감탄한 시어머니는 맛있게 잘 먹었고 며느리는 갈비에 붙이는 덧살 속에 가래떡을 심지처럼 넣어 말랑말랑하게 구워내는 등 극진하게 시어머니를 모셨다.

이렇게 태어난 동두천식 떡갈비는 삽시간에 입소문을 타면서 며느리에게 방법을 전수받아가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솜씨 좋은 며느리는 진짜 뼈대를 넣어 석쇠에 굽거나, 크게 빚은 후 부침개처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개발하면서 동두천식 떡갈비를 완성해 나갔다.

이가 덜 난 자식을 위해 곱게 다진 고기를 입안에 넣어주던 친정어머니의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모신 동두천 전주 며느리의 효성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매료시키고 있다.
 

 

 

 

 

맛도 크기도 전국 유명세, 수원 왕갈비

화성 축조 때 큰 우시장 형성
1956년 ‘수원갈비’ 판매 시작
박정희 전 대통령도 반한 맛


수원도 갈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1940년대까지 수원에 있던 전국 최대 우시장 덕분에 갈비의 고장으로 등극했다. 수원 우시장이 컸던 이유는 정조가 시행했던 화성 축성 때문이었다.

농업 중심 사회였던 조선은 농사에 없어선 안 될 소의 도축을 엄격히 금지했다.

하지만 대규모 화성 축조를 위해서는 인부들의 강인한 체력이 요구됨에 따라 화성에서 만큼은 소의 도축이 허용됐다.

또한 정조대왕은 수원화성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모으기 위해 전국의 백성들을 모아 논밭을 나누어 주고 덤으로 소 한 마리씩을 빌려 주었다.

이는 3년 후 반납하는 조건이라 송아지를 구하기 위한 우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당연히 소갈비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동수원사거리와 이목리 노송거리에 갈비촌이 형성돼 있지만 원래 수원갈비의 시작은 영동시장 싸전거리였다고 한다.

해방 무렵, ‘화춘옥’이라는 음식점에서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때 한 손님이 ‘이렇게 큰 갈비는 국에 넣지말고 따로 불에 구워 먹자’고 제안했는데 그 맛에 반해 숯불에도 구워 보고 양념도 바꿔보며 연구를 한 끝에 1956년부터 처음으로 ‘수원갈비’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오랜 전통에 따라 내려온 수원갈비는 부드럽고 좋은 맛 뿐 아니라 한 대 5㎝ 이상 되는 크기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혼자서 한 대를 다 먹지 못 할 정도로 푸짐해 ‘왕갈비’로 불리게 됐다.

또 간장 아닌 소금으로 간을 맞춰 산뜻한 맛과 신선한 색상이 그대로 살아있어 눈까지 즐겁게 해 주었다.

거기다가 꺼져가는 숯불에서 굽는 방법은 갈비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맛에 반한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시흥에서 달려온데다 1970년대 이르러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수원 왕갈비를 맛보기 위해 찾으면서 전국세를 타게 됐다.

수원 왕갈비는 1995년부터 매년 갈비축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 위용을 높이고 있다.

왕갈비와 함께 수원을 대표하는 특산 명주 불휘주도 함께 하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불휘는 ‘뿌리’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누에에서 자란 동충하초와 홍삼, 오디, 구기자, 복분자 등의 한약재로 제조해 스트레스 억제,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조주형기자 peter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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