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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아버지의 비밀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3. 예쁜 아이

 

“박천수가 팬티를 어떻게 끌어 내렸니?”


죽고 싶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일 자체가 고역인데, 형사는 서류파일을 들고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한 시간째 꼬치꼬치 이상한 것까지 거듭 캐물었다. 윤희는 지옥만큼이나 고약한 면접시험장에 앉은 것 같은 기분으로 형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박태호의 집으로 찾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유리창 몇 개를 더 때려 부순 아버지는 이번에는 경찰서를 찾아가 왜 박천수를 잡아 처넣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그래서였는지 다음 날 오전에 동천경찰서 조사과 최 형사라는 사람이 서류파일을 들고 병실로 찾아와 피해자 신문이라는 걸 시작했다. 중년의 형사는 질문 자체를 조금 미안해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윤희에게 아주 구체적인 답변을 들으려고 했다. 조사는 한 가지를 물어서 답변을 들으면 곧바로 받아적고, 다시 묻고 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윤희가 답변을 머뭇거리자 형사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어쩔 수 없어. 이게 우리가 하는 조사 절차야. 현장 상황을 세세하게 정리해야 하니까 이렇게 물을 수밖에. …그래, 박천수가 팬티를 어떻게 끌어 내렸냐?”


“그냥… 팬티 끈을 움켜쥐고 아래로 확… 끌어내렸어요.”


처음부터 발갛게 달아올랐던 윤희의 볼이 이젠 터질 듯했다. 서류에 뭐라고 적어넣은 형사가 다시 물었다. 


“박천수도 바지를 벗었어?”


“네?”


“너의 팬티를 벗긴 다음 박천수도 바지를 벗어 성기를 꺼냈느냐 이 말이야.” 


“아니요. ……아니, 사장님이 옷을 벗었는지 어쨌는지는 저도 몰라요.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라 살필 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박천수의 성기를 보거나 몸에 닿은 적은 없다는 말이지?” 


숨이 훅하고 막혀왔다. 왜 이런 것까지 다 묻고 대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러면, 박천수가 팬티를 내리는 순간 곧바로 뺨을 한 대 때리고 몸을 밀쳐내고 도망쳤다는 얘기네.”


“네. 맞아요.”


형사가 서류 위에다가 한참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물었다. 


“박천수가 처벌받기를 원하니?”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데요?”


“그거야 법정에서 판사님이 결정할 일이지만, 강간미수죄는 가벼운 죄가 아니라서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어.”


윤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박천수가 한 짓을 생각하면 큰 벌을 받게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집안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린 여고생에게 이런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닐 것이었다. 카페 안에서 속절없이 당하던 때가 다시 떠올라 부르르 진저리가 났다. 윤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 아저씨 엄한 벌을 받길 원합니다.”

 

학교에 갔다. 일주일 만이었다. 예기치 못한 큰 사건이 발생하고, 병원에 입원해있던 날이 나흘, 퇴원한 다음 이틀을 더 집에서 쉬었다. 작은 도시인 동천시에서 윤희가 당한 일은 소문이 금세 퍼져 있을 거였다. 어머니는 무릎의 상처에 겨우 딱지가 앉기 시작한 몸으로 등굣길에 나서는 딸을 배웅하며 터무니없는 소문과 사람들의 무심한 입방아 걱정에 긴 한숨을 늘어놓더니 조용히 일렀다. 얘야. 누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지 일절 귀에 담지 말아라.


교문 앞에서 만난 영서와 명혜의 눈길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걱정하는 말들을 했지만, 그 눈빛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궁금증만 보였다. 왠지 서먹했다. 친구들의 관심은 짙은 호기심에 머물러 있을 뿐 윤희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자 담임 장시욱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 선생은 윤희를 한 번 가볍게 안아주고 어깨를 툭툭 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같은 반 아이들이 차례로 교실로 들어왔다. 대개는 놀란 눈으로 윤희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제자리로 갔다. 몇몇 아이들은 눈물을 머금기도 했다. 하나같이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머릿속이 멍하여 오전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윤희는 영서를 불러 운동장 한구석 등나무 밑 벤치로 갔다. 영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윤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영서야. 난 괜찮으니까,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다 얘기해줘. 누가 말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돼. 묻지 않을게. 나에 관해서 어떤 말이 나도는 거니?”


“너에 …관해서?”


“그래.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있는지 내가 모두 알아야 좋을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도 괜찮으니까 있는 대로 들은 대로…….”


“그래, 우린 친구니까. 네가 알고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 사실 …여러 가지 말이 나돌고 있어. 워낙 네가 예쁘다 보니까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네가 카페 아프리카 사장 박천수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원조교제를 해왔다는 말도 나오고…네가 먼저 박천수 사장에게 꼬리를 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어. 그리고…….” 


“또 있어? 뭐야?”


“이걸 꼭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모르겠는데, 네 엄마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야.”


“우리 엄마 아버지? 무슨 이야기인데?”


영서는 말을 정말 해야 하나 참아야 하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윤희는 영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사실은 …사실은 말이야. 나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너희 아버지가 너를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소문이야. 네 엄마가 아버지를 속였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하지만 누군가 못된 사람이 재미로 지어낸 거짓말일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윤희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내가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니?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아니면 정말 그렇다는 거야?”


“내가 들은 말로는 네 아버지가 그렇게 여긴다는 거였어.”


말문이 막혔다.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 소문은 아버지의 거듭되는 술주정과 의처증, 폭력성, 정서불안 증세와 곧바로 연결되면서 윤희를 순식간에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정말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가 그런단 말인가. 백지장처럼 하얘진 윤희의 얼굴을 살피던 영서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영서가 윤희를 와락 끌어안으며 당황한 음성으로 말했다. 


“윤희야. 미안해. 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나 봐. 미안해. 미안해…….” 


윤희는 눈물짓는 영서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니야. 잘 말해줬어. 내가 꼭 알아야 할 말들이야. 고마워, 영서야.” 

 

얼마 남지 않은 발표회를 앞두고 그날도 연극반 연습이 있는 날이었지만, 윤희는 방과 후 곧바로 귀갓길에 나섰다. 버스를 타는 대신 집으로 향하는 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윤희에게 살갑지 않았다. 학교에서 한 번도 빠짐 없이 우등상을 받아오는 딸인데도 마음 놓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교통사고 이후 알코올중독이 되다시피 한 다음부터는 더욱 그랬다. 보고도 못 본 척, 한결같이 무심한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늘 주눅이 들어있었고, 아버지가 술주정을 늘어놓을라치면 언제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절절맸다. 윤희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이 자꾸만 의식되었다. 힐끗거리며 수군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 윤희가 당한 봉변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까지도 소문을 다 들어 아는 사람들이 돌아서서 무한정 입방아를 찧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신문기자가 윤희를 찾아옵니다. 기자는 누구의 제보를 받고 찾아왔을까요? 윤희네 가정에는 또다시 커다란 위기가 닥쳐옵니다. 다음 주 금요일 후편 ‘[4] 예쁜 아이 -⓷ 엄마의 전쟁’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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