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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도 서울대 사학과 교수들 지도한 스에마쓰 야스카즈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임나일본부설⑥

 

* 제국주의 역사학을 반성했던 일본 사학자들

 

전 호에서 사례를 들었지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대한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존경심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 직속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1904~1992)에 대한 존경심은 남다르다. 광복 후에도 서울대 사학과를 들락거리면서 교수들을 지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1927년 도쿄제대를 나와서 조선사편수회 간사가 된 스에마쓰는 1933년에는 경성제대 조교수를 겸임했다. 한 해 전에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하던 경성제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를 꿰찬 것이다.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편찬하던 <조선사> 편찬사업을 주도했고,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39년에는 경성제대 교수로 승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성의 기운이 일었다. 일본의 역사학이 침략전쟁의 도구로 전락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제국주의 역사학을 황국사관(皇國史觀)이라고도 하는데, 대표적인 이론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과 서기 369년 고대 야마토왜(大和倭)가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약 200여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었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논리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상식적인 시각만 갖고 있으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369년에 야마토왜는 국가가 아니었고, 철을 만드는 제철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야마토왜(大和倭)에 대해서 <일본사대사전>은 “옛 국가의 이름이자 현재의 나라(奈良)현(지역)”이라고 설명하지만 언제 건국했는지는 쓰지 못하고 있다. 일본극우파들은 물론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열렬히 추종하는 <일본서기>는 야마토왜가 서기전 660년에 건국했다고 쓰고 있지만 이는 실제 건국연대를 1천년 정도 끌어올린 것이란 사실은 일본 극우파들도 안다.

국가도 아니었고, 제철기술도 없었던 야마토왜가 369년에 철의 왕국 가야를 점령하고,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는다는 것은 소설로 쓰더라도 3류 판타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945년 일제 패전 후 일본 역사학자들도 이런 황국사관에 대해 반성한 것이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이 바로 스에마쓰 야스카즈다.

 

 

*학습원대학이라는 곳

 

일본으로 쫓겨 간 스에마쓰는 1947년 학습원(學習院) 교수로 초빙된다. 학습원은 일제 때 이른바 화족(華族)이라고 불렸던 왕족·귀족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도쿄제대, 와세다대와 함께 일본 극우파 사상, 즉 황국사관의 수원지였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쿄제대나 와세다대보다 더 심했다. 도쿄제대나 와세다대는 그나마 외형상 대학의 꼴을 취하고 있었기에 군인들이 총장을 맡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학습원은 달랐다.

학습원의 12대 원장(1907~1912)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청일전쟁과 대만침략, 러일전쟁에 종군한 육군대장이었는데, 학습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1912년 7월 30일 일왕 메이지가 죽자 같은 해 9월 10일 메이지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자살하면서 애꿋은 부인 시즈코(静子)까지 죽인 위인이었다. 학습원 제16대(1937~1939) 원장은 해군대장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郎)였고, 그 뒤를 이어 일제 패망 때까지 원장이었던 17대(1939~1946)도 해군대장 야마나시 가쯔노신(山梨勝之進)였다. 제13대(1920~1922) 원장도 육군대장인 이치노에 효우에(一戸兵衛)였으니 학습원은 이른바 황족(皇族) 군사학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습원은 1949년 민영화되면서 학습원대학으로 개편되는데, 스에마쓰는 문정학부(文政學部) 교수가 되어 같은 해 <임나흥망사>를 발간해 일본 역사학자들의 반성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스에마쓰가 쓴 <임나흥망사>의 내용은 간단한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강역을 크게 확대한 것이다. 같은 식민사학자지만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임나 강역을 경상남도 김해라고 한정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이를 경상북도까지 확장시켰다. 스에마쓰는 이를 다시 충청·전라도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강역이 엿가락처럼 늘어난다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모두 허구라는 뜻이다. 그러나 스에마쓰의 메시지는 강렬했다. “대일본제국은 한국을 다시 점령할 것이니 제국의 신민들이여 일시적 패배에 좌절하지 말고 황국사관을 가슴 깊이 새기라!”는 메시지였다.

 

 

*스에마쓰의 남한경영론

 

이런 스에마쓰의 <임나흥망사>에 대해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기존의 지명 고증을 비롯한 문헌고증 성과에 의존하면서 한국·중국·일본 등의 관계사료를 시대순에 따라 종합함으로써 고대 한일간 대외관계사의 틀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최초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이른바 「남한경영론(南韓經營論)」을 완성시켰으니, 그 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7-신라·가야>”

 

‘남한경영론’이란 야마토왜가 남한을 모두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뜻인데, 이것이 “최초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스에마쓰의 학문적 업적이라는 극찬이다.

이 글에서 김태식은 국사편찬위원회를 대신해서 스에마쓰의 논리를 무려 일곱 가지로 정리해 자세하게 제시했다.

첫째 3세기 중엽에 야마토왜는 가야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으며 진왕(辰王)보다 더 큰 통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야마토왜는 ‘369년에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남 일부를 차지해 임나 지배체제를 성립시켰고 제주도를 백제에게 주어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시켰다’는 것이다. 즉 야마토왜는 3세기 중엽에 이미 한반도 남부에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다가 369년에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충청도 일부를 지배하는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 백제를 조공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셋째 “광개토왕릉비의 기사로 봐서 야마토왜는 400년 전후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해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즉 야마토왜는 400년 전후에 바다를 건너 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전쟁을 치를 정도로 강력했고, 백제를 더욱 확실하게 지배했다는 것이다. 일곱째 야마토왜는 신라로부터 646년까지 다다라(多多羅) 등 4읍에 대한 세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562년 무너졌지만 신라는 646년까지도 야마토왜에 세금을 납부하는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김태식은 이렇게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논리를 아주 친절하게 일곱 가지로 정리한 후 형식적 비판을 가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나라(奈良)에 있던 야마토왜가 큐슈(九州)지방까지 힘을 뻗치게 된 것은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이며, 각 지방세력을 행정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은 7세기 후반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4세기에는 야마토왜가 큐슈지역도 지배하지 못했는데 남한을 경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야마토왜가 임나를 200년 이상 군사지배를 했으면 그 지역에 일본유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유물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369년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 식민지로 지배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간단하게 “야마토왜가 369년 가야를 지배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허구다”라고 정리하면 될 것을 ‘최초로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한경영론’ 운운하면서 일곱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해 독자들을 헷갈리게 한 것이다.

 

*해방 후에도 서울대 교수들 지도했던 스에마쓰

 

일본인 학자들이 1960년대 이미 스에마쓰 학설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북한의 김석형이 1963년에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을 발표해 스에마쓰를 비롯한 황국사관론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뿌리부터 해체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임나는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 분국이라는 논리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이후 일본학자들도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고는 스에마쓰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거꾸로 스에마쓰 학설을 정설로 추종하고 있다. 스에마쓰가 해방 후에도 국내를 들락거리면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들을 지도했고, 일본 극우파들이 한국 유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대 주면서 황국사관을 교육시킨 후 귀국시켰기 때문이다. 서울대 사학과에 재직하다가 연세대에서 정년을 마친 김용섭 교수의 자서전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의 말미에 서울대 교수 시절 스에마쓰와 관련한 짧은 일화가 나온다.

 

“민족주의 역사학인가, 실증주의 역사학인가에 관하여 검토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교학부장 고윤석 교수도 포함된 네댓 명의 중년·노년의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간사 출신 스에마쓰가 광복 후에도 국내를 들락거리면서 서울대 사학과 교수들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다. 역사학계는 여전히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지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달라졌는가? 이 분야를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면 안다. 남한 강단사학은 여전히 조선사편수회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 지배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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