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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아버지와 십자가

 

아버지는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다. 중학교 졸업 학력이었지만 필체가 좋으셨다. 아버지의 펜글씨를 보고 있자면 ‘아, 나는 왜 아버지 필체를 닮지 못했나!’ 안타까워했다. 필체를 빼고 나는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마실 나갈 때 따라나선 나를 본 동네 어르신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저 놈 보소. 뒷짐 지고 걷는 것도 지 애비를 닮았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아버지는 장흥에서 양복 가봉하는 일을 하다가 목포로 나가서 택시회사 경리를 하셨다. 몇 년 후 우리 식구들도 전부 목포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새로 산 옷을 가난한 동료 택시기사들에게 벗어주고 들어오셨다. 월급봉투를 제대로 채워 들어오시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타박했지만 아버지는 ‘허허’ 거리고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하셨다.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말이다. 한밤에 나는 이불속에서 동네 어귀에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빵 봉투가 들려있었다.

 

문제는 술이었다. 아버지는 술이 아무리 취하셔도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어쩔 때는 퇴근하는 택시기사님들이 집에 내려주고 가시기도 했다. 어머니의 ‘아이고 내 팔자야’ 타령은 세월이 지날수록 그 목소리가 더해갔다. 술은 집안 내력이었다. 큰 아버지가 먼저 위암 수술을 받은 뒤 결국 위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두 번째 위암 수술을 하셨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집으로 보냈다.

 

나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살리고 싶었다. 누군가가 서울 신림동의 용하다는 암 전문 약국을 소개했다. 다 죽어가는 암환자를 살린다는 약국에 들어서자 큰 십자가가 벽에 걸려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라는 성경구절과 예수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여기라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겠다’ 하는 묘한 믿음이 생겼다. 심지어 약사는 나에게 한 달치 약을 공짜로 지어주며 한 달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말고 약만 먹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약사의 말대로 했다. 계속 토했고 피를 토했다. 그러나 약사는 낫는 과정이다. 암세포가 죽는 현상이라고 했다. 한 달 후 거액을 주고 6개월 치 약을 다시 지었다. 아버지는 그러고도 두 달 더 약을 먹었다. 아버지의 몸은 바짝 마른 미라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행곤아! 닭백숙 먹고 싶다.”

나는 닭을 직접 잡았다. 닭죽을 쓰고 살을 발라드렸다. 아버지는 맛나게 닭을 드셨다. 드시다가 토하고 또 드셨고 또 토하고 그러면서도 닭을 드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그 이후 십자가를 믿지 않는다.

 

나는 종교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신봉한다.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철저하게 옹호한다. 그러나 신앙이 타인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전광훈 목사를 보고 있노라면 30여 년 전 약국에 걸려있었던 십자가가 생각난다. 가장 나약한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예수라면 어떤 손을 내밀었을까? 십자가가 진열장에서 고객들을 부르는 상품으로 보인다. 나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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