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몰랐을까. 몰라서, 신神은 죽었다고 말했을까. 어떤 사람은, 그의 말을 선언이 아니라 절규라고 해석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목격한 자의 고백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신은 사랑이고 정의이며 자비라고 했다. 그런 해석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 신은 그 해석대로인가. 그러하다면, 신의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온갖 죄악은 무엇인가. 전쟁과 차별과 혐오는 무엇인가. 그것도 사랑인가. 사랑이라면, 피난민의 천막을 조준하는 총구는 정의이고, 어린 학생의 교실을 관통하는 미사일은 자비인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끝없이 신을 부르짖으며 살아가는데, 정작 인간의 부름에 답하는 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묻는다. 내 안의 나에게 내가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거룩하게 살아서 임하는가. 거룩하게 임한다면, 왜 말이 없는가. 도대체 왜, 사랑은 보이지 않고 정의는 부러지고 자비는 도망치는가. 도대체 어느 구석 어떤 경계에 존재하기에 빌고 또 빌어도 대답이 없는가. 혹시, 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게 아닐까. ‘of our own making.’ 그렇게 태어난 게 종교
어느 토요일, 한 환자 분이 “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라고 인사를 한다. 좋아졌고 편해졌다는 말은 한의사로써 언제 들어도 반갑고 기쁘다. 실제로 자율신경검사 (Heart rate variability;HRV)결과도 개선되었다. 이분은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이나 튀긴 밀가루 음식 혹은 맥주와 같은 찬음식을 먹으면 더부룩하게 소화가 안되거나 설사를 자주 해서 내원하였다. 항상 음식을 먹을때는 소화가 되지 않을까 설사를 하지 않을까 긴장하고 염려하였다고 했다. 한약을 복용하면서 한약의 멀티타겟의 효과로 인해 대변과 소화기능, 그리고 60대가 넘어가면서 쉬 피로해지는 컨디션이 같이 좋아졌다. 한의사의 한약처방은 단일성분이 아닌 복합성분으로 이루어진다. 일부단일성분을 추출하거나 화학적 합성한 성분이 아닌 자연물인 식물 혹은 동물성 약재를 사용한다. 그리고 대개는 더욱 효과적이기에 단일약재보다 여러 종류의 약재를 복합적으로 조합하여 처방한다. 한약처방의 의도는 기계적인 관점으로 국소적 메커니즘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 시스템론적인 전인적인 관점에서 인체라는 복잡계의 에너지시스템의 항상성을 조절해주는데 이 과정에서 멀티타겟, 즉, 다양한 증상군에 효과를 나타낸다
지금 한국 사회는 감정과 이념의 과잉 속에 균형을 잃고 있다. 여론은 순간적인 정서에 휘둘리고, 정책은 단기 대응에 치우치며 방향성을 잃는다. 논쟁은 많지만, 사회적 합의는 좀처럼 결집되지 않는다. 조급한 공론과 감정적 정치가 반복되면서 국가의 장기 전략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물론 감정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성과 공동체 정신, 더 나아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이 함께하지 않으면 감정은 편향으로 흐르기 쉽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근저에는 이러한 균형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감정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이성과 함께, 공동체와 미래를 성찰할 수 있는 사고 능력을 지닌 존재다. 감정, 이성, 통찰이 조화를 이룰 때, 개인은 자기 삶을 넘어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는 성숙한 주체로 발전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이 균형 감각이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사심(史心)’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오늘을 해석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집단 지성이자 시대정신이다.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방향은 달라진다. 시류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공과(功過)를 냉정하게 따져 후손을 위
언론을 상대하는 업무를 맡는 분들에게 긴히 청한다. 사람을 하늘처럼 받들겠다는 이재명 정부에서도 반(反)민주적인 이 퇴영적(退嬰的) 언어로 (나를 비롯한) 숱한 ‘인간’들이 통칭될 줄은 몰랐다. 누구라고 기분 개운할까?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에 관한 몇 언론의 글들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관형사’가 떠억 그 명칭(총리) 앞에 또 붙었더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의 집합(개념)인 만인은 그 일인(대통령)의 아래(一人之下)이면서 동시에 총리의 아래(萬人之上)라는 직설적 언어다. 임금 말고는 모두가 그의 아래라는, 왕조(王朝)시대 영의정의 위상을 표현하던 말이다. 대통령이나 그의 대변인, 또는 총리 후보가 그런 말이나 연상(聯想)작용을 부를 개념을 썼을 리는 없다고 본다. 벼락 떨어질 것이 빤히 보이지 않는가. ‘대통령의 입’ 강유정 대변인은, ‘어공’이지만, 언사(言事) 계통의 ‘국대급 선수’로 글 계통에서 눈길을 많이 받던 세련된 문필가다. 한국어의 구조, 작동의 원리를 꿴 듯한 평이(平易)하면서 명료한 문체가 특징이다. ‘기자들의 글’도 아는 인사다. 현실적으로는 논란도 있을 수 있지만, 대통령과 총리가 사람 또는 (유권자이면서 납세자인)
테슬라는 올해 6월 중으로 로보택시를 출시할 예정이다. 테슬라는 그동안 전기차를 생산하면서 자율주행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 왔다. 일론 머스크는 지난해 10월 로보택시인 사이버캡과 로보밴을 선보였는데, 마침내 역작인 로보택시가 나오게 되었다. 테슬라의 로보택시는 일단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등으로 확대될 것이다. 테슬라는 자율주행차인 로보택시 산업에서 후발주자이다. 미국에서 구글이 오래전부터 자율주행차를 개발해왔으며, 자회사인 웨이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보택시를 상용화하였다. GM도 크루즈를 통해 로보택시 사업에 진출했으나, 지난해 로보택시의 보행자 충돌사고를 계기로 철수하였으며, 현재 엔비디아와 함께 자율주행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아마존은 자율주행차 스타트업인 죽스를 인수하고 로보택시 산업에 뛰어들었으며 현대차그룹이 투자한 모셔널도 로보택시 사업에 참여하였다. 로보택시는 승차공유 산업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승차공유 업계의 선두주자인 우버는 로보택시 도입을 위해 폭스바겐 등 18개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다. 우버는 오스틴에서 웨이모의 로보택시를 공급받아 플랫폼인 우버앱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 승차공유…
작년 12월 3일 밤은 여느 때나 다름없는 일상적인 밤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느닷없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온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된 지 지난한 6개월여가 흐른 지난 6월 3일 내란 사태로 인해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내란 종식과 함께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제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우리 국민의 상당수는 불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이번 내란 사태를 계기로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더불어 민주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동안 민주주의는 현존하는 정치제도 중에서 최고의 제도라고 철통같이 믿어 왔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막강한 권력과 권한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을 외면할 때, 민주주의가 붕괴할 수 있다는 걸 체험한 것이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적(敵)으로 간주했을 때, 민주주의의 권력분립의 핵심적 개념 요소인 견제와 균형은 여지없이 깨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하버드대학교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
어느덧 여름이 시작됐다. 느닷없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선한 바람과 적당한 햇살을 즐기며 하루를 보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고 햇빛은 얼굴을 따갑게도 때린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해가 지고 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 1년 중 며칠 안 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름밤 날씨를 즐기고 있는 나날들이다. 이런 밤 날씨엔 조금은 비루해 보이는 플라스틱 소재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있는 동네 작은 술집에서 동네 친구와 맥주 한잔하면 좋겠지만 그런 소소한 바람조차 요즘엔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바쁜 일상 속에서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 있다. 그저 씻고 눕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체력이 모두 소진된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시작되는 일정에 맞춰 몸을 일으킨다. 그래도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좋은 날’이 오겠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지금은 아쉬움을 참아야 할 때이고, 즐길 여유는 나중에 만들어야 할 몫이라 생각한다. 기약 없는 어떤 좋은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도, 사람이 늘
국내에서 한국영화가 위기 소리를 듣고 있지만 해외에서의 관심과 시장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영화의 진짜 위기는 이 불일치의 간격을 빨리 좁히지 못하는 것에 있다. 12일(상파울루 현지시간) 시작돼 19일에 끝나는 제14회 브라질 한국영화제는 지난 해와 달리 유료 티켓으로 진행돼 관객 수는 약간의 경감이 있긴 하지만 비교적 여전히 뜨거운 관심 속에 열리고 있다. 현지 영화제 매니저인 이동현 브라질 한국문화원(원장 김철홍) 주무관은 젠더 문제를 다룬 작품들, 곧 '딸에 대하여' '대도시의 사랑법'은 만석 매진이어서 "한국이나 브라질 모두 젊은 관객들의 관심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전선영 감독의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페막작으로 초청됐으나 상파울루 예술대학의 ESPM(광고홍보학과) 영화관에서 16일에 먼저 상영돼 깊은 관심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작품이 갖고 있는 여성 서사에 대해 영화 고관여층인 대학생 관객들은 깊이 있는 질문들을 쏟아 냈다.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국내 미개봉작이며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만 공개된 상태다. 이번 제14회 브라질 한국영화제에는 22편의 장단편 영화들이 초청됐다. 영화제
노동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인간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움직임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 목적과 의도를 갖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순간부터 노동은 시작됐다. 진화의 시계로 보면, 약 2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그 출발점이다. ‘손재주 있는 인간’이라는 이름처럼, 그들은 인류 최초로 도구를 만들었다. 자연의 돌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쪼개고 깎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가공했다. 이 최초의 석기, 올두완 도구는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에 개입하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바로 그 순간, 노동은 진화의 한 축으로 등장했다. 침팬지도 나뭇가지를 이용해 개미를 잡지만, 도구를 제작하고 그것을 전승하는 종은 인간뿐이다.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고 계획하며, 미래를 상상한다는 뜻이다. 호모 하빌리스는 불을 피우고, 사냥을 위해 무기를 만들며, 공동체 안에서 도구를 공유했다. 이 모든 과정이 노동이다. 도구는 기술이 되고, 기술은 기억과 문화를 낳는다. 노동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문명의 조건이자 인간됨의 출발점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은 ‘손’이다.…
잘파세대(Zalpha Generation)! 학자마다 출생연도를 구분하는 데 있어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잘파세대란 대체로 Z세대(1995~2009년생)와 알파세대(2010년 이후 출생)을 합친 새로운 세대를 의미한다. 이들은 스마트폰과 AI·메타버스·초연결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디지털 온리(Digital only)’세대다. 지금까지 연구된 잘파세대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면, 우선, 디지털 온리세대다. 디지털 환경에서 자라 정보습득, 소비, 소통을 온라인 세상에서 해결한다. 또한 이미지, 영상, 숏폼에 익숙한 기술친화적 세대로, 자신의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고 공유하는 콘텐츠크리에이터다. SNS에 자신의 이미지나 영상을 업로드하여 개인브랜딩을 실현한다. 더불어 개인화와 ‘자중감’의 세대다. 자신의 관심사, 취향에 맞추어 살고자 하고,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가벼운 관계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 상황형 관계)을 선호한다. 그러면서도 진정성을 갖춘 꾸밈없고 솔직한 대화를 원한다. 이들은 현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불확실성이 커진 세상에서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