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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조선사편수회 삼총사가 발굴한 일 왕가의 시조묘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②

 

이마니시 류의 ‘삼국사기’ 불신론

 

한국 강단사학자들이 아직도 존경해 마지않는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다.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실무를 맡으면서 경성제국대 교수도 역임했다.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는 가짜고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극력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사연구(1933)’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대부분 조작되었다면서 “신라 제1왕 박혁거세 즉위년은 후대의 왕위계승의 연대에서 계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박혁거세의 즉위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후대의 왕위계승의 연대에서 계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그 후대의 왕이 누구이며, 어떻게 계산했더니 성립되지 않는지 논증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 무조건 ‘믿을 수 없다’고 우기는 것뿐이다. 이마니시 류는 또한 “문헌이 없는 시대의 즉위연대가 이렇게 뚜렷할 수가 없다”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가짜로 몰았다. 문헌이 없는 시대라는 것도 이마니시의 억지에 불과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 사관들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고로 삼았던 고대 문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본 ‘구 삼국사’

 

그중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구삼국사(舊三國史)’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사적을 읊은 장편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썼다. 그가 이를 쓰게 된 계기는 스물여섯 살 때인 명종 23년(1193) ‘구삼국사’를 직접 본 것이었다. ‘구삼국사’는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역사서로 고려 초기에 편찬된 것이었다.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고려 사람들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유학자인 자신은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삼국사’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이렇게 썼다.

 

“지난 계축년(1193)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 생각했는데 세 번을 거듭 읽어 점점 그 근원으로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직필(直筆)의 책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이규보, ‘동명왕편 서문’)”

 

‘삼국사기’는 1145년 발간되었는데 그 50여년 후인 1193년까지도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규보나 김부식은 현 길림성 집안현에 세워져 있는 고비(古碑)가 광개토태왕릉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요(遼)나라 황제비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동명왕편’에는 추모왕이 자신을 ‘천제의 자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 말한 것처럼 태왕릉비와 일치하는 기술이 많다. ‘삼국사기’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스물두 살 때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쓰고 있는데, ‘동명왕편’은 그 어머니 유화가 “해를 품고 주몽을 낳으니 이해는 계해년이었다(懷日生朱蒙/ 是歲歲在癸)”라고 썼다. 서기전 58년인 계해년에 주몽이 태어났다는 것이니 스물두 살 때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한다. ‘삼국사기’는 백제 무령왕의 사망연도만 정확하게 맞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출생 및 건국연도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일 왕가의 시조묘, 사이토바루 고분군

 

그럼에도 이마니시 류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내물이사금(재위 356~402) 때까지의 기사는 무엇에 의하여 편성되고 무엇에 의하여 기년(紀年)했는지가 불분명하다”면서 “신라 내물왕과 유사한 연대인 일본의 숭신(崇神) 이전은 왕명(王名)·왕비명(王妃名)이 있는 것이 고작인데 신라는 번잡하게 기년체기사로 쓰여졌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가 ‘일본서기’보다 자세하니 가짜라는 것이다.

 

필자는 2016년 일본 큐슈(九州) 남부 미야자키(宮崎)현에 있는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군을 답사하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삼총사의 흔적을 모두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토바루 고분은 남북 4.2km, 동서 3.6km의 범위 안에 현재 319기의 고분이 남아 있는 대단지 묘지군이다. 앞은 사각형이고 뒤는 원형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31기가 남아 있고, 네모난 방분(方墳) 1기, 둥근 원분(圓墳) 27기가 있는데 횡혈묘(橫穴墓)들도 있다. 횡혈묘란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까지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든 무덤으로 우리 고대 무덤 양식이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을 소개하는 일본 서적들은 “황조(皇祖)의 발상지(發祥地)”라고 설명하고 있다. 황조(皇祖), 즉 현 일 왕가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답사한 것을 기념한 구조물과 기념식수가 남아 있다. 그런데 고분의 축조시기에 대해서 “‘구주의 고분’은 3세기 말부터 6세기까지의 무덤(吉村靖德, ‘九州の古墳(2015)’)”이라고 말하고 있고,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은 “4세기 초에서 7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있고, ‘서도원고분군’도 “4세기 전반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北鄕泰道, ‘西都原古墳群(2005)’) 이는 다시 말해서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자랑하는 현 일본 왕실의 시작이 아무리 빨라야 3세기 후반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 왕가의 뿌리는 가야계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학술답사를 진행한 유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발굴에 조선사편수회 회장이었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아리요시 쥬이치(有吉忠一)와 조선사편수회 고문이었던 교토제국대 교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그리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했던 이마니시 류가 이 발굴에 모두 관여하고 있었다.

 

미야자키현 지사(知事)였던 아리요시 쥬이치가 미야자키 현을 ‘황조의 발상지’라면서 “고대 일향국(日向國)의 역사를 실증해야 한다”고 발굴을 제안한 것이다. 구로이타 가쓰미는 이 발굴을 지휘했고, 이마니시 류 역시 이 발굴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회장 아리요시, 고문 구로이타, 위원 이마니시는 모두 야마토왜가 큐슈 남부 미야자키에서 가야계에 의해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빨라야 3세기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야마토왜의 시작을 서기전 660년으로 서술하고 있는 ‘일본서기’가 시기를 1천년 가까이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국에 건너와서 황국의 역사는 서기전 660년에 시작되었다고 우기면서 ‘일본서기’는 진짜고 ‘삼국사기’는 가짜라고 주장했다.

 

일제 식민사학은 처음부터 학문이 아니라 사기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서기’ ‘신대기(神代紀)’는 야마토왜의 시조들이 고천원(高天原, 다마마가하라)에서 바다를 건너 와 일향(日向, 히무가)에 나라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 고천원이란 다름 아닌 경북 고령의 대가야다.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 철모와 사이토바루 고분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철모가 완전히 같다는 점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가야계가 현해탄을 건너 야마토왕가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꾸로 야마토왜가 서기 369년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우긴 일제 식민사학, 그리고 광복 75년이 넘도록 이를 추종하는 남한 강단사학, 세계 사학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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