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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고구려 건국사화가 가짜라는 쓰다 소키치 (17)

 

이병도가 존경한 식민사학자들

 

쓰다 소키치는(津田左右吉:1873~1961)는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와 함께 지금도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다. 남한 강단사학계의 이른바 태두(?)라는 이병도의 회고를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병도는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쓰다 소키치에게 배웠다. 이병도는 1982년 4월 『광장』지에서 와세다 시절 일본인 스승들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 3학년 때의 강사(그 후에는 교수)인 쓰다 죠오끼지(津田左右吉:쓰다 소키치) 씨와 또 그의 친구인 이께우찌 히로시(池內宏, 동경대 조선사교수:이케우치 히로시) 씨의 사랑을 받아 졸업 후에도 이 두 분이 자기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보내 주어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원래 남의 논문이나 저서를 많이 보아야 연구방법이나 학식의 향상을 보게 되는데 그 당시 일본학계의 최첨단을 걷는 이 분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인이지만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이병도가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라고 흠모하면서 ‘일본학계의 최첨단을 걷는 분들’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분들로 극찬했으니 이병도를 떠받드는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이들의 학문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였던 고려의 북쪽 국경을 1천5백리 이상 끌어내려 함경남도 안변이라고 우긴 식민사학자다.

 

이들이 이병도가 졸업한 후에도 왜 자신들의 논문이나 저서를 보내주면서 관리했는지 이병도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감읍해 마지않으면서 이들의 식민사학을 광복 후에도 강단사학계의 정설로 만들었다.

 

 

고구려 건국사화가 거짓이라는 쓰다 소키치

 

쓰다 소키치의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학문이 무엇인지를 그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비판을 통해서 살펴보자. 그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사화가 거짓이라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려기(麗記)의 건국설화는 통일 이후의 신라인이 『위서(魏書)』 고구려전(高句麗傳)과 고구려에서 전해 내려온 얼마간의 기록 또는 고구려인으로부터 주어진 근소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위지(魏志)』 나 『후한서(後漢書)』 등의 지나(支那:중국)의 사적(史籍)의 기재(記載)와 당시의 북방에 관한 막연한 지리적 지식에 의하여 그것을 윤색한 것이다(쓰다 소키치, 『삼국사기』 고구려기비판(高句麗紀の批判) 1922)”

 

려기(麗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뜻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고구려 건국기사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건국사화는 통일 이후 신라 역사가들이 조작했다는 것이다. 신라 역사가들이 『위서』, 『위지』, 『후한서』 등과 북방에 관한 막연한 지식을 토대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신라 건국사화도 아니고 신라 역사가들이 왜 고구려 시조를 ‘하늘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조작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와 『조선상고사』 등에서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100년 이상 더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나라 가충언(賈忠言)이 당(唐) 고종(高宗)에게 “고려비기(高麗秘記)에 의하면 ‘고구려는 9백년 못 미쳐 마땅히 80세 대장에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한(漢)나라로부터 지금까지 9백년입니다”라고 말과 『삼국사기』 문무왕 10년(서기 670)조에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하면서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추모왕)은…자손이 서로 잇고 뿌리와 줄기가 끊어지지 않았고…햇수는 장차 800년이 되려고 하였다”라고 말한 것과 ‘광태토태왕릉비’ 등을 근거로 신라 사가들이 고구려 건국 시기를 늦추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는 『삼국사기』를 무조건 거짓으로 몰기 위해 고구려 건국기사도 가짜라고 우겼다.

 

 

국내외 사료들이 말하는 고구려 건국사화

 

쓰다 소키치가 말한 『위서』 「고구려열전」은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스스로 시조는 주몽(朱蒙)이라고 말하는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내용과 거의 같으니 『삼국사기』가 이를 보고 베꼈다는 것이다. 『위서』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역사서인데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550~559) 연간에 편찬한 역사서다. 북제는 동위(東魏)의 실력자였던 고환(高歡)의 둘째 아들 고양(高洋)이 동위 효정제(孝靜帝)를 내쫓고 세운 왕조로서 고환·고양의 성을 따서 고제(高齊)라고도 한다. 고환·고양 등에 대해서 중국 학계에서는 한족화(漢族化)한 선비족이라고 우기지만 동호(東胡)인 선비족을 한족이라고 우기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북제서(北齊書)』에서 고환을 발해군(渤海郡) 수현(蓨縣) 출신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고구려 왕성인 고씨일 가능성이 높다.

 

『위서』 「고구려 열전」은 부여에서 남하하다가 큰 강에 가로막힌 주몽이 “나는 해의 아들이요(我是日子), 하백의 외손이다(河伯外孫)”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강에 가로막힌 주몽이 “하늘의 아들이다(天帝之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세운 「광개토태왕릉비」는 주몽이 “황천의 아들이다(皇天之子)”라고 말했다고 나온다. 1935년 길림성 집안(集安)에서 발견된 「모두루(牟頭婁)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하백의 외손이요 해와 달의 아들이다(河泊之孫 日月之子)”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위서』보다 먼저 세운 「광개토태왕릉비」의 내용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담겨 있다. 고구려와 가까웠던 선비족들이 고구려인들의 사료를 보고 『위서』 「고구려 열전」을 썼을 것이다. 신라 역사가는 『구삼국사』를 비롯한 고구려 건국사화를 보고 그대로 실은 것이지 자신들이 멸망시킨 나라를 ‘하늘의 아들’의 제국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중국 사료에 나와도 가짜, 안 나와도 가짜

 

쓰다 소키치는 또 “중국사적(中國史籍)에 고구려의 수장(首長)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왕망(王莽) 때의 도(騊:추〔騶〕)인데, 이것이 『삼국사기』의 세계(世系) 속에 보이지 않는다.”면서 조작으로 몰았다. 이는 『삼국지』 「동이열전」 고구려 조 등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新, 서기 8~23년)나라를 세운 왕망이 흉노정벌을 위해 고구려 군사를 징발했으나 고구려는 거꾸로 중국을 공격해 요서(遼西) 대윤(大伊) 전담(田譚)을 전사시켰다.

 

왕망의 명을 받은 엄우(嚴尤)가 고구려 제후[句麗侯] 도(騊)를 유인해 목을 베자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高句麗)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으니 가짜라는 것이다. 도(騊)는 고구려 국왕이 아니라 『삼국지』에 기록된대로 고구려 제후거나 변방 장수였다. 고구려 임금들의 전기를 수록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쓰다 소키치는 때로는 『삼국사기』 기록이 중국 기록과 같지 않으므로 가짜라고 주장하고, 때로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차대왕(次大王) 등의 호칭은 중국의 사서와 같다”면서 가짜라고 주장했다. 중국 기록과 달라도 가짜, 같아도 가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병도가 “실증적이고 비판적”이라고 칭송한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 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불신론의 실체이다. 쓰다 소키치와 이병도를 스승으로 삼는 남한 실증주의 사학에 왜 ‘실증’이 없는지 말해주는 사례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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