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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윤심덕 in 나폴리

안휘의 장편연재소설-① 행운의 여신

  • 안휘
  • 등록 2020.10.16 06:37:45
  • 16면

 

…윤희는 단원들이 다 모인 소극장 무대 위에서 ‘사의 찬미’를 불렀다. 희로애락을 과하게 보여주는 것은 빵점짜리 배우야. 관객들은 울지 않는데 배우가 먼저 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별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구나, 그치?”

파가니니 홀 탈의실에서 옷을 챙겨입은 뒤 이민지는 윤희를 호텔 2층에 있는 모모야마라는 일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기모노 차림의 여종업원에게 회 초밥 정식으로 주문을 마친 이민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누드모델 여파로 정신이 아직 얼떨떨한 윤희를 향해 물었다.

“네.”

윤희는 이민지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했다.

“나는 네가 정말 신기해. 처음 보는 순간 너의 내면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틀리지 않았어. 오늘 누드모델 연기 아주 좋았어. 첫 경험이었는데, 그렇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네가 타고난 연기자라는 증거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살다가 왔니?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들이시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윤희는 잠시 생각을 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동천시에서 왔어요. 부모님들은 지난해 교통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고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했어요. 세상에 혼자 남게 돼서, 연극배우가 되기 위한 희망 하나만 갖고 무작정 대학로로 왔어요.”

새삼스럽게 눈물을 흘리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민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면서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윤희의 손을 잡았다.

“그랬구나. ……. 너는 반드시 훌륭한 배우가 될 거야. 아니,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고맙습니다, 언니.”

“아무 걱정 하지 마.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알았지?”

“네.”

이민지가 핸드백을 열고 A4용지 몇 장으로 된 서류 같은 것을 꺼내어 넘겨주면서 말했다.

“이거 카프카가 준비하는 다음 연극 자료인데, 가지고 가서 한번 봐. 얼마 후에 오디션이 열릴 거야.”

이민지가 넘겨준 자료 겉표지의 ‘윤심덕 in 나폴리’라는 연극 제목이 보였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윤희에게 이민지가 다시 말했다.

“너 혹시 ‘사(死)의 찬미’라는 노래 아니?”

“예.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께서 가끔 부르셨어요. 일제강점기 때 클래식 가수였던 윤심덕이라는 가수가 불렀다고 들었어요.”

“그래. 루마니아 작곡가인 이오시프 이바노비치가 지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곡 일부에 얹은 노래지.”

“김우진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윤심덕이 일본에서 이 노래를 녹음하고 난 후 돌아오는 뱃길에서 유부남인 그 남자하고 함께 투신자살했다는 말도 어머니께서 들려주셨던 거 같아요.”

“잘 알고 있구나. 그런데 우리가 하려고 하는 연극에서는 윤심덕과 김우진이 죽지 않아.”

“네?”

“대본이 나오면 알겠지만, 전개는 같고 결말은 완전히 다른 연극이란다.”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두 사람은 말을 끊고 식사를 했다. 제대로 된 일본 전통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윤희에게 회 초밥은 깔끔하고 혀에 착착 감기는 맛이었다. 배가 고팠던 윤희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

동숭동 집으로 돌아온 윤희는 어머니가 자주 부르던 사의 찬미 가사와 음을 떠올리며 이민지가 준 자료를 읽었다. 연극 줄거리는 1926년 8월 3일 윤심덕과 김우진이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호를 타지 않았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당시에도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는 논란이 많았다고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던 유부남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도쿠주마루호의 갑판장을 매수한 다음 명단에 이름만 적고 다른 배를 타고 몰래 중국으로 도망쳤고, 중국인 부부로 신분을 위장해서 이탈리아로 간 다음 미술용품 가게를 하면서 살았다는 풍문을 사실처럼 담고 있었다. 윤희는 묘한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가 요정에서 기생으로 살던 어머니를 만나 도주하듯 서울을 떠난 심사도 그런 것이었을까. 사랑의 힘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사색에 빠져 있던 윤희가 문득 골목 입구까지 태워다준 이민지가 “오늘 모델료야.” 하면서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 봉투가 기억났다. 옷걸이에 걸린 원피스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보았다. 뜻밖의 큰돈이 들어있었다.

*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윤희는 단원들이 다 모인 소극장 무대 위에서 ‘사의 찬미’를 불렀다. 희로애락을 과하게 보여주는 것은 빵점짜리 배우야. 관객들은 울지 않는데 배우가 먼저 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감정을 빼앗아 먹는 짓이거든. 적당히 슬프게, 관객들이 따라 울지 않으면 안 되게 끌어내야 해…. 수없이 강조하던 장시욱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려왔다.

 

차기작 ‘윤심덕 in 나폴리’의 극본 초본이 나온 지 일주일 만에 열린 극단 카프카의 오디션이었다. 백두 단장이 풍기는 아우라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었다. 새 작품을 시작할 때 배역을 정하는 일에서 그는 철저한 실력 위주의 오디션 선별법을 쓴다고 이민지가 들려줬다.

 

윤심덕 역에는 이민지를 비롯하여 김미리, 송현아, 이성희, 그리고 윤희까지 모두 다섯 명이 경연에 나섰다. 김우진 역에는 한상석, 최현규, 박정욱, 손정우 그렇게 네 명이 도전했다. 극단에 갓 들어온 햇병아리 연기자인 윤희는 구경만 하려고 했다. 그렇게만 해도 좋은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민지는 한사코 도전을 권유했다. 그녀의 강권을 뿌리칠 수 없어서 꼴찌순서로 오디션 무대에 올랐다.

 

오디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윤희의 눈으로는 윤심덕 역에는 역시 이민지를 따라갈 배우가 없어 보였고, 김우진 역에는 귀티 나는 생김새에 바리톤 급 중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최현규라는 배우가 가장 돋보였다. 오디션이 다 끝나도록 백두 단장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민지 역시 윤희에게 특별히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과는 사흘 뒤에 발표한다고 고지됐다.

*

오디션 이틀 뒤 윤희는 이민지와 함께 강원도 양양 하조대에 있었다. 사진작가클럽의 야외 누드 촬영이었다.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를 배경 삼아 기암괴석이나 소나무와 어우러지는 포즈를 취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맨발로 거친 바위 위에 서고 눕고 기댄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진작가들이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표정까지 만들어야 하는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대포처럼 생긴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들도 험한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혼쭐이 나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뒤 부재중으로 찍힌 번호로 휴대전화 통화를 하던 이민지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통화를 마친 그녀가 윤희의 어깨를 툭 쳤다.

“놀라지 마라. 네가 다음 연극 주연을 맡게 될 것 같단다.”

“네에?”

주연이라고? 이건 말도 안 돼. 말문이 막힌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민지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

“말이 안 되잖아요. 햇병아리나 마찬가진데, 제가 어떻게…….

“말이 되는 일이야. 꿈도 아니야. 우리 카프카에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백두라는 아주 특별한 단장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다. 축하한다. 윤희야. 이제 기적이 시작되는 거야. 잘 해낼 수 있어.”

“그래도 이제 극단에 갓 들어온 제가 주연을 맡는다는 걸 누가 받아들일까요?”

이민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지금 네 안에 있는 잠재력의 크기를 잘 모르고 있는데, 백두 단장님은 그걸 간파해낸 거야. 절대 기죽지 말고 해내야 해. 그리고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윤희야.”

기뻐야 할 텐데, 두려움이 먼저 가슴을 짓눌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윤희는 야릇한 불안에 잠겨 있었다.

 

=> 주연의 행운을 잡은 윤희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음 주 ‘[15] 윤심덕 in 나폴리-② 태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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