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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여우] [15] 윤심덕 in 나폴리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② 태풍

  • 안휘
  • 등록 2020.10.23 07:26:16
  • 16면

 

 

…김도숙을 보내고 돌아온 한상석의 얼굴이 사색이 돼 있었다. 이민지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뭔 일 있어요?”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 “김미리가요?”…

 

“막은 넉 달 뒤에 오른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백두 단장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사무실에 모여앉을 때부터 단원들의 분위기는 탱탱한 긴장이 넘쳤다. 이민지는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나오지 않았다.

중년 윤심덕 역 주연엔 이민지, 예비주연은 이성희가 맡도록 발표됐고, 젊은 윤심덕 주연에는 김윤희, 예비주연으로 송현아와 김미리가 차례로 지명됐다. 김우진 역에는 윤희의 예상대로 최현규가 주연, 박정욱이 예비주연으로 지명됐다. ‘화가와 여간호사’에서 화가 역을 맡았던 한상석은 조연출을 맡게 된다고 발표됐다. 그밖에 10여 명의 단역 배역이 정해졌다. 배역 발표를 마친 백두 단장은 휭하니 사무실을 나갔고, 사무실 분위기는 술렁대기 시작했다.

윤희는 극단에 들어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주연으로 발탁된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명단을 발표할 적에 심하게 일그러지는 김미리의 표정을 보았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그녀는 백두 단장이 나가자 흥분으로 달아오른 두 볼에 눈물까지 주르륵 흘렸다. 윤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폭발할 것 같은 김미리의 모습에 뭐라고 걸어볼 말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몇몇 단원들이 김미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한참 만에야, 새 연극에서 단역을 맡는 것으로 발표된 손정우가 윤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행운의 여신이 빨리 찾아왔네요.”

윤희는 얼떨결에 악수를 받으면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이래도 되는 건지, 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단장님께서 김윤희 씨에게서 뭔가를 발견하신 겁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잘 됐어요.”

윤희는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손정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연출을 맡은 한상석이 준비된 메모지를 들고 앞에 나섰다.

“연극 ‘윤심덕 in 나폴리’의 조연출을 맡은 입장에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 극단이나 연극을 준비하고 배역을 정할 때마다 배우들의 불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자신의 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여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연기자로서 결코 성공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만약 배역에 대한 불만을 도저히 소화하지 못하겠다는 단원이 있다면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카프카를 떠난다고 해도 잡지 않겠습니다.”

뜻밖의 강수였다. 단원들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그때, 흥분으로 얼굴이 벌게진 김미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한상석은 연설조의 말을 이어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배우는 연출자의 꼭두각시가 되면 안 됩니다. 작품 안에서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해야 합니다. 다만 대사에 손을 대는 일은 어디까지나 연출자의 몫입니다. 의견은 자유롭게 개진하되 결정은 연출자와 상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곱씹어볼 구석이 있는 설명이었지만, 한상석은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밖으로 뛰쳐나간 김미리의 행동을 의식해서인지 사무실 안 단원들은 묘한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김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책상에 놓인 개인물품도 그대로였다. 손정우의 말에 따르면, 휴대전화기도 꺼져 있고 종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

보름 동안의 독회를 통해 극본을 익힌 카프카 단원들은 합숙수련에 들어갔다. 양평 두물머리 근처에 있는 카프카의 전용 수련장은 그리 넓지 않았다. 창고를 개조한 연습실과 주거공간으로 쓰는 조립식 주택 그렇게 두 채였다. 수련장은 별도의 취사담당이 있지 않아 경력이 짧은 단원들이 당번을 정해 모두 해결을 해야 했다. 연습량이 많은 주연이었음에도 윤희는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늘 잠이 부족했다. 연습은 주로 조연출 한상석이 맡아서 지휘했다.

합숙수련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나타난 백두 단장은 그동안의 연습에 대한 점검부터 시작했다. 한상석의 리드로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맡은 역할을 차례로 연기했다. 백 단장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그는 배우의 심리상태까지 한눈에 꿰뚫어 보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사람 같았다. 차례가 되어 역할 연기를 다 마쳤을 때 윤희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숨이 콱 막히는 듯한 기분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백 단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걸쭉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윤희 넌 지금 어디에서 연기한 거냐?”

“……?”

“네가 지금 한 연기는 무대에서 한 게 아니잖아!”

좋은 말을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백 단장의 말은 뜻밖으로 냉랭했다.

“네 머릿속에는 온통 나만 가득 차 있어. 단장 한 사람을 위해 하는 연기가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이야! 그따위로 해서 무대에 오를 수나 있겠어?”

맞는 말이었다. 무대에서 연기한다는 생각은 전혀 있지 않았다. 오직 백 단장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희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백 단장의 말을 곱씹었다. 단장은 한나절 배우들의 연기를 점검한 다음 저녁 무렵 다시 서울로 나갔다.

*

“백두 단장님 계세요?”

다음 날 낮이었다. 두물머리 수련장으로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카키복 패션을 한 젊은 여성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카메라를 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목소리를 빼고 외양만 봐서는 마치 남자 같았다.

“어디에서 오셨지요?”

대문을 열어준 윤희가 물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한동안 윤희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한참 만에야 되물었다.

“아, 김윤희 씨? 다음 연극 주연 맡으신 분 맞죠?”

그때 안채에서 나온 조연출 한상석이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김도숙 기자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아, 예. 조연출 맡으셨다지요? 축하합니다.”

뒤따라 나온 이민지도 김도숙을 아는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김 기자님.”

“이민지 배우님도 계셨네요.”

김도숙 기자가 윤희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한상석에게 물었다.

“이 아가씨가 이번에 주연을 맡으신 분인가요?”

“예. 우리 극단의 막내 김윤희 씨입니다.”

김 기자는 수첩을 펼치고 꽂혀 있던 명함을 한 장 뽑아서 윤희에게 내밀었다.

“주간 스타스토리 김도숙이라고 해요. 다음번에 인터뷰하러 다시 올게요.”

“아, 예.”

김도숙은 한상석과 이민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듣던 대로 김윤희 씨 정말 미인이네요. 이미지도 참 야무지고 좋아요. 카프카에서 인재 하나 제대로 스카웃한 것 같은데요?”

이민지가 김도숙의 옷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단장님은 어제저녁 서울로 나가셔서 안 계세요. 그래도 일단 들어오세요. 차라도 한잔하고 가셔야지요.””

“아뇨. 이 근처에 다른 일로 왔다가 백 단장님 계신가 하고 잠깐 뵈러 왔는데, 안 계시다니 가봐야지요.”

김도숙은 그러더니 한상석을 향해 말했다.

“조연출 선생님, 저기 대문 밖에서 저하고 따로 얘기 좀 하실까요?”

한상석이 김도숙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

밖으로 나간 지 한참 만에 김도숙을 보내고 돌아온 한상석의 얼굴이 사색이 돼 있었다. 이민지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뭔 일 있어요?”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

“김미리가요?”

한상석은 곁에 윤희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는 이민지를 연습실로 이끌고 갔다. 김미리가 사고를 치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한상석의 표정으로 보아서 결코 작은 일 같지는 않았다. 배역 발표를 하던 순간 눈물짓던 김미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 차기작을 준비 중이던 카프카 극단에 예기치 못한 회오리가 몰아칩니다. 다음 주 ‘[16] 윤심덕 in 나폴리-③ 인동초처럼’에서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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