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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김수로왕은 동이족 황제와 소호의 후손

다시 보는 가야사③

 

 

김유신 비문의 수수께끼

 

김수로왕은 수수께끼의 인물인데, 그 조상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기사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있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 김유신의 비문에도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후손이다’라고 했으니 즉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 기사에는 김수로왕의 조상이라는 두 임금이 등장한다. 헌원과 소호이다. 헌원은 황제(黃帝) 헌원씨를 뜻하고, 소호는 소호 김천씨를 뜻한다. 황제 헌원씨와 소호 김천씨는 모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고대 군주들이다. 그것도 사마천의 《사기》 첫 대목인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등장하는 군주들이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작을 다섯 명의 제왕을 뜻하는 오제(五帝)로 설정했는데, 첫 제왕이 황제(黃帝) 헌원씨다. 《사기》의 첫 구절은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성은 공손(公孫)인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중국사가 황제 헌원씨부터 시작한다고 말한 것인데, 〈김유신 비문〉은 김수로왕이 황제 헌원의 후예라는 것이다. 소호 김천씨는 황제의 맏아들이다.

황제는 서릉(西陵)씨의 딸인 누조(嫘祖)와 혼인했는데, 둘 사이에 낳은 자손들에 대해서 《사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조는 황제의 정비(正妃)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가 천하를 얻었다. 그 첫째가 현효(玄囂)인데, 이 이가 청양(靑陽)이 된다(《사기》 〈오제본기〉 황제)”

 

황제는 황후 누조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이 소호이고, 둘째 아들이 창의이다. 사마천이 말하는 황제의 첫째 아들 현효가 바로 소호를 뜻한다. 중국 고대의 역사학자 황보밀(皇甫謐:서기 215~서기 282)은 고대 제왕의 계보에 대해서 서술한 《제왕세기(帝王世紀)》를 썼는데, 여기에서 “현효와 청양은 곧 소호”라고 말했다. 황보밀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학자인 송충(宋衷)도 현효와 청양이 곧 소호라고 말했다. 황제의 맏아들이 소호인대 사마천은 왜 소호라는 알려진 이름 대신 알려지지 않은 현효나 청양이라는 이름을 썼을까? 소호는 그때나 지금이나 학자들은 다 인정하는 동이족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잘 알려진 소호 대신 알려지지 않은 ‘현효’ ‘청양’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이유가 있다.

 

 

 

신라인들이 쓴 김수로왕과 김유신의 조상들

 

《삼국사기》에서 김수로왕이 ‘헌원과 소호의 후예’라고 말한데 대해서 한국 강단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는 “가야의 연원을 중국의 전설적 인물에 붙이는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일종이 모화사상에서 나온 것(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이라고 부정했다. 이병도를 추종하는 다른 학자들도 김수로왕이 헌원과 소호의 후손이라는 이 기사를 후대에 만들어진 사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믿지 못하겠다’는 심증뿐 이 내용을 반박하는 구체적 사료를 제시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김유신 비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김부식은 김수로왕이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는 이 기사를 《삼국사기》 〈백제 의자왕 본기〉 뒤에도 인용했다. 그리고 김부식 자신이 이 기사 뒤에 “논하여 말하다”라면서,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 비문과 박거물(朴居勿)이 짓고 요극일(姚克一)이 글씨를 쓴 삼랑사비문(三郎寺碑文)에서 이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유신 비문을 썼다는 설인선과 삼랑사비문을 썼다는 박거물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모두 신라인들이다.

신라에서 삼국통일의 영웅인 김유신 비문을 아무나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재위 661~681)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아들이다.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 세상을 떠난 후 흥덕왕 10년(835) 신하로서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될 정도로 신라 왕실에서 높였던 인물이므로 그 비문은 신라 왕실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비문에 김수로왕과 김유신에 대해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라고 했다면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마천이 지운 동이족의 역사

 

사마천은 《사기》에서 중국사의 시작을 황제라고 서술하면서 그 제위를 맏아들 소호가 아니라 소호의 동생 창의의 아들 전욱이 이었다고 서술했다. 사마천은 중국사의 문을 연 오제를 ‘①황제→②전욱→③제곡→④요→⑤순’의 순서로 서술했는데, 1대 황제부터 3대 제곡까지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표1)계보도

사마천이 설정한 황제와 소호 김천씨 계보도

                                  ①황제 ━━━누조

                                                ┃

         ┏━━━━━━━━━━━━━━━━━━━━━━━┓

소호 ━━경도                                                          창의━━창복

         ┃                                                                          ┃

                                                                             ②제전욱(고양)

       교극

        ┃

③제곡(고신)

 


                             

사마천은 황제의 제위를 맏아들 소호가 아니라 소호의 동생인 창의의 아들 전욱이 이었다고 설정했다. 맏아들 소호를 제치고, 맏손자도 아닌 둘째 아들 창의의 아들이 제위를 이었다고 서술했으니 누가 봐도 무리한 제위계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이런 계보에 반발했다. 그중 한 명인 황보밀은 《제왕세기》에서 소호가 오제의 첫 군주라고 서술했다.

사마천이 설정한 계보도를 보면 사마천이 숨기고자 했던 중국상고사의 비밀이 그대로 드러난다. 황제와 누조 사이의 두 아들이 소호와 창의다. 그런데 소호는 중국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동이족이다. 소호가 동이족이라면 소호와 부모가 같은 창의가 한족(漢族)일 수 있을까? 창의도 동이족일 수밖에 없다. 둘째아들 창의도 동이족이라면 창의의 아들 전욱도 동이족이고, 소호의 손자 곡도 동이족이다. 또한 맏아들 소호가 동이족인데 그 부친 황제는 동이족이 아닐 수 있을까? 그러나 동이족의 역사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바꾸기 위해 황제를 한족(漢族)으로 설정해 중국사를 시작하면서 동이족이 명백한 소호를 지우고 창의의 아들 전욱이 황제의 뒤를 이었다고 설정한 것이다.

김유신 비문에 수로왕과 김유신에 대해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다”라고 쓴 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황제 헌원과 소호 김천씨가 모두 동이족이기 때문이다. 중국상고사가 대부분 동이족의 역사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최근의 일들이다. 그런데 1천3백년도 훨씬 전에 쓴 김유신 비문에 이미 수로왕과 김유신을 황제 헌원과 소호 김천씨의 후예로 기록했다. 이는 가락국의 건설이 동이족의 이동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가락국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동이족의 역사까지 추적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