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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김수로왕과 진시황은 소호 김천씨의 후예다

다시 보는 가야사④

 

◇소호 김천씨를 지우려했던 사마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소호 김천씨를 지우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마련했다. 잘 알려진 소호 김천씨라는 이름 대신 누구인지 잘 모르는 현효(玄囂)라는 이름을 쓴 것도 소호를 지우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소호 자체를 지울 수는 없었다. 소호는 황제(黃帝)의 큰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첫 부인은 서릉씨(西陵氏)의 딸 누조(嫘祖)였는데, 이에 대해 《사기》 〈오제본기〉는 이렇게 썼다.

 

“누조는 황제의 정비(正妃)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가 천하를 얻었다. 그 첫째가 현효(玄囂)인데, 이 이가 청양(靑陽)이다(《사기》 〈오제본기〉)”

 

이 현효가 바로 김수로왕과 김유신의 조상이라는 소호 김천씨다. 사마천은 잘 알려진 소호라는 이름 대신 현효, 청양 등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을 쓰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청양은 강수(江水)로 내려가 살았다. 그 둘째가 창의(昌意)인데, 약수(若水)로 내려가 살았다.”

 

황제의 큰 아들인 청양, 곧 소호 김천씨는 강수에 살았고, 둘째 아들인 창의는 약수에 살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고대의 역사강역을 크게 확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강 이름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주요 지리개념 중의 하나가 네 큰 강이라는 뜻의 사독(四瀆)이다. 사독은 하수(河水), 회수(淮水), 제수(濟水), 강수(江水)를 뜻하는데, 현재 중국에서 하수는 황하(黃河), 강수는 중국 남방의 장강(長江), 즉 양자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사 특유의 ‘강역넓히기’에 따른 역사왜곡의 한 사례이고 실제 강수는 산동성 기하(沂河)이다. 산동성에 있던 강수를 호남성 등지의 양자강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그런데 역사지리서인 《괄지지(括地志)》는 강수에 대해서 “안양(安陽) 고성(故城)은 예주(豫州) 신식현(新息縣) 서남현 80리에 있다.”고 주석을 달았다. 강수가 흐르는 곳에 안양 고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안양 고성이 바로 동이족 국가 은나라의 도읍지였던 은허(殷墟)로서 현재 하남성에 있다. 고대 중국의 역사학자였던 응소(應劭:153~196)는 강수를 옛날 강국(江國)이라고 말하고 있고, 《지리지》도 “안양은 옛날 강국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강수에 소호 김천씨가 군주로 있던 강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위치가 은허가 있는 하남성 안양이라는 뜻이다. 동이족 소호 김천씨의 강국이 있던 하남성 안양이 훗날 동이족 국가 은나라의 도읍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은나라 시조 설(卨)이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 세운 진(秦)나라

 

 

중국의 《백도백과(百度百科)》에서 소호를 찾아보면 중국인들의 고민을 알 수 있다. 소호에 대해 “황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누조이다. 소호(少皞)라고도 하는데 성은 희(姬)고 이름은 지(摯)이고 자(字)는 현효(玄囂)다. 화하(華夏)의 인문시조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최종적으로 동이부락의 수령이 되었는데, 청양(靑陽)씨라고 부른다. 김천(金天)씨라고도 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앞에서는 화하족의 인문시조라고 써 놓고 뒤에서는 ‘동이족의 수령이 되었다’라고 모순되게 써 놓은 것이다. 한 사람이 화하족의 시조도 되고, 동이족의 시조도 될 수는 없다. 소호가 동이족이란 사실이 너무 명백하니 화하족의 시조도 되고 동이족의 시조도 된다고 물타기를 한 것이다.

소호의 후예들이 건너와 세운 나라가 바로 가락국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진(秦)나라도 소호 김천씨의 후예가 세운 나라이다. 《사기》에서 국가 제사에 대해 모아놓은 〈봉선서(封禪書)〉에 진나라 양공이 제후가 되어서 스스로 소호의 신을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쪽 제사터인 서치(西峙)를 세우고 백제(白帝)에게 제사지냈다고 말하고 있다. 진나라 양공이 조상인 소호에게 제사지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기》 〈봉선서〉 주석에는 “진나라 군주는 서쪽에서 소호(少昊)에 대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희생물은 흰색을 숭상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이족이 흰색을 숭상하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이다.

 

 

◇소호 김천씨의 후예들끼리 격돌한 장평대전

 

 

진나라 왕실이 소호의 후예라는 것은 중국의 성씨연구가들은 모두 동의하는 내용이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것은 서기전 221년이지만 진나라 중원통일의 계기가 된 것은 40여년 전에 발생한 장평대전(長平大戰)이었다. 서기전 262년부터 서기전 260년까지 진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서 발생한 장평대전은 중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전쟁이다. 이 대전에서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나라 군사가 승리하는데, 3년에 걸친 이 치열한 전투 끝에 조나라 군사 약45만여 명이 전사했고, 진나라도 20만명 이상의 군사가 전사했다. 이때 백기는 조나라에서 항복한 군사를 땅에 묻어 죽였는데, 그 숫자를 사료에 따라 20여만명에서 40여만명까지로 전하고 있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을 파묻어 죽인 계곡이 있는 산을 ‘두개골 로(顱)’자를 써서 두로산(頭顱山)이라고 부르고, 이 산 꼭대기에 지은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고 불렀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에는 훗날 당 현종이 이곳을 지나면서 크게 탄식하고 고승 삼장(三藏)에게 수륙재(水陸齋)를 칠일 밤낮으로 베풀어 조나라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또한 한 시인의 시를 부기하고 있다. “백 척 백기대는 모두 해골인데, 어찌 구구하게 만 개의 해골에 그치랴! 화살과 돌이 무정했던 전투에서 이기려 한 것이지만 가련하다 항복한 군사들은 무슨 죄인가(高臺百尺盡頭顱,何止區區萬骨枯!矢石無情緣鬥勝,可憐降卒有何辜)”

그런데 장평대전에서 진나라와 사생결단하고 싸운 조(趙)나라도 같은 소호의 후손이자 진나라와 조상이 같은 동족이었다. 소호의 후손 중에 중연(中衍)과 헌조(軒祖)가 있는데, 이들은 진나라 왕실과 조나라 왕실에서 공동으로 선조로 모시는 조상들이다. 장평대전은 같은 조상을 둔 후손들 수십만이 서로 죽고 죽였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장평대전 이후로 전국(戰國)시대의 여러 나라들은 진나라와 단독으로 맞서지 못하게 되면서 합종이니 연횡이니 하는 연합책이 나타났고, 끝내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했다.

소호의 후손이 세운 나라 중에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잘 알려진 나라가 담국(郯國)이다. 지금 산동성 남부의 임기(臨沂)시 담성(郯城)일대에 있었는데, 서기전 11세기에 소호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이 담국에 대해 중국의 《유기백과(維基百科)》는 “담국의 조상은 동이족 소호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춘추좌전》 노(魯)나라 소공(昭公) 17년 조에 담국의 군주인 담자(郯子)가 소공과 나눈 대화가 나온다. 소공이 왜 소호씨는 새의 이름을 가지고 관직명을 삼았느냐고 묻자 담자는 “나의 고조 소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마침 봉황새가 날아들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소호가 제위를 잇지 못했다고 썼지만 황보밀(皇甫謐)은 《제왕세기》에서 소호가 “백 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고 달리 썼다. 소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로는 진나라, 조나라와 담국 외에 한반도의 가락국까지 있었다. 대수(代數)는 다르지만 모두 소호 김천씨를 공통의 조상으로 모시는 같은 동족의 나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