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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기증유물 이야기(6)] 북벌의 선봉장, 이완 장군

1992년 10월, 경주이씨 국당공파 정익공 종중... 180여 점 기증
이완 장군의 갑옷·투구·깃대·묘지석 등... 교지 132매 모두 전해 중요 자료
'청에 당한 수치 씻고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 그 중심에 섰던 인물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이 기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개인이나 단체 등에게 있어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할 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이에 본보는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와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도박물관 전시실의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총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경기도박물관은 1996년 6월 21일 개관했다. 이보다 앞선 1991년 5월, 경기도립박물관 건립을 위한 현상설계경기 공모에는 총 5개 업체가 응모했는데, 건축가 장세양(1947~1996)이 이끄는 공간건축이 수원 화성을 모티브로 한 설계로 대상을 받았다.

 

완공 후에는 건축가협회상·김수근 건축상 등을 수상했다. 성곽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외관에 발맞춰 전시실 내부에는 명품 유물뿐만 아니라 홀로그램 영상·터치모니터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전시기법을 적용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렇게 박물관의 건립은 개관 수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박물관 구성 요소의 하나인 유물의 수집도 경기도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추진했는데, 그 중 ‘경기도립박물관 건립에 따른 유물모집 운동’이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

 

 

경기도에서는 1992년 3월부터 유물 모집운동을 실시했다. 유물 수집을 위해 각 시·군 문화공보실을 비롯해 읍·면사무소 등 총 444개의 신고센터를 운영, 1994년까지 12명의 기증자에게서 515건의 유물을 기증받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100여 차례의 언론기관 홍보도 실시됐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경기도의 역사와 전통문화 생활상을 재조명하고, 내 고장의 역사 문화를 발굴 보존하며, 도민들의 문화 애호의식을 높이기 위해 건립되는 경기도립박물관에 기증 가능한 대상 유물은 경기도 출신이 제작한 작품이나 유물·유품 등 경기도와 관련된 유물이면 가능합니다. 유물 기증을 원하시는 시민께서는 각 동사무소나 구청 총무과 또는 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관련 서류를 살펴보면 각 시군에 담당자를 지정해 반상회보 게재나 유관기관 협조, 관계단체 협조, 매스컴 홍보 실적 등을 도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유물수집 운동이 얼마나 비중 있는 업무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유물모집 운동의 성과 중 하나로 1992년 10월 29일 경주이씨 국당공파 정익공 종중의 이규동님께서 기증하신 180여 점의 기증유물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정익공 종중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효종(孝宗, 재위 1649~1659)과 함께 북벌을 주장한 이완(李浣, 1602~1674) 장군을 배출한 가문이다.

 

주요 유물은 이완 장군의 유품인 갑옷·투구·깃대·묘지석·교지류 등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완 장군이 무과병과에 급제하고 받은 교지를 비롯해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 받은 교지부터 1674년 마지막 관직인 우의정에 재수되면서 받은 교지까지 132매가 모두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완은 특히 경기도와 인연이 많은 인물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해 평안도병마절도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643년 4월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다.

 

 

그 해 5월 경기도수군절도사겸삼도통어사京畿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禦使에 임명돼 수도 외곽의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이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으로 임명됐고, 1671년 5월에는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 등을 거쳐 우의정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완 장군은 정묘·병자 두 차례의 호란으로 조선사회가 매우 충격에 빠져있던 시기에 활동했다. 한낱 북방의 오랑캐 정도로 여기던 청에게 당한 치욕적인 패배와 이에 따른 수모는 지배층과 민중에게 커다란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청에 당한 수치를 씻고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이완 장군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세자시절부터 계획하고 있던 북벌사업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그는 이완, 원두표(元斗杓, 1593~1664) 등과 함께 산성을 보수하고 군제개혁을 실시하는 등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이와 함께 군비 확충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군수 재정도 상당부분 안정적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이완은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맡으면서 군사문제에 관한 효종의 자문에 응하고 각종 군제개혁 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효종과 그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됐을 뿐, 대다수 정치세력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추진됐다. 또한 청의 국력이 날로 커지고 흉년과 자연재해가 겹쳐 백성의 부담이 커지면서 북벌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결국 효종은 집권 후반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그 타개책의 일환으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손을 잡았지만 ‘북벌’에 대한 노선의 차이로 실행되지 못하고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 계획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새롭게 리모델링된 경기도박물관 전시실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코너에는 이완 장군의 투구와 깃대·활과 화살·지석 등이 전시돼 있다.

 

후손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지 30년이 훌쩍 지난 2020년 지금, 이완 장군은 경기도박물관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글=이성준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리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